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생계형변호사 Nov 14. 2019

한 지붕 수십 가족

우리는 알고 보면 우리가 아닌 걸.




우리 고갱님들 대부분은 사건 상담을 하러 와서는 슬그머니 "근데 여기는 변호사가 몇 명이나 있어요?"하고 묻는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아니 그게 뭐 궁금할까 싶겠지만 사실 우리 고갱님들이 저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변호사 수와 해당 법무법인 내지 법률사무소의 능력이 정비례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 그러니까 '변호사 수=로펌의 능력'이라는 등식이 머릿속에 성립해있기 때문이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이른바 '유명 로펌'치고 소속된 변호사 수가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소수인 경우는 없으니 뭐 저렇게 기대를 갖는 것도 대충 이해는 된다만, 결론적으로 소속 변호사 머릿 수와 로펌의 능력 사이에는 별 상관관계가 없다.


변호사는 근본적으로 모두가 '1 인형 독고다이 자영업자'인지라 각자의 능력과 역량에 따라 자기가 맡은 일을 성사시키고, 자기의 네임 밸류를 창출하고, 자기의 매출을 끌어올리고자 아등바등할 뿐이다.


단순히 소속된 변호사의 수가 많다고 해서 자동으로 능력 있는 로펌이 되고, 돈 쓸어 담는 로펌이 되고, 높은 네임 밸류 가진 로펌이 되는 건 결코 아니다.




이 바닥 로펌 중 상당수는 이른바 '별산제'라는 운영방식을 택하고 있는데, 이게 뭐냐면 여러 명의 변호사가 모여서 로펌을 굴리고 있지만 비용 분담이나 수입 귀속은 완전히 개별적으로 이루어지는 체제를 말한다(이 점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회사의 운영과 로펌의 운영은 좀 다르다).


즉, 로펌 운영에 소요되는 비용은 변호사마다 철저히 자기와 관련된 만큼(이를테면, 사무공간 사용료나 사무기기 사용료 같은 거)만 분담하고, 수입 역시 철저히 각자 벌어 챙겨가는 방식인데, 특히 비용 분담 문제는 매우 예민한 이슈여서 심한 경우에는 복사기에 들어가는 토너랑 종이값 분담을 놓고 변호사끼리 크게 다퉈 법인이 깨지는 다소 어이없는 일도 생긴다.


그에 비해, 벌어들이는 수입은 변호사 각자의 능력에 따라 편차가 매우 커서 어떤 이는 늘상 돈 쌓을 곳을 못 찾아 억 소리를 내고, 어떤 이는 늘상 자기가 쓰는 방 값 내는 것조차 힘겨워 악 소리를 낸다.


이런 체제는 좀 더 쉽게 비유해서 쇼핑몰에 입점해 있는 각 매장 업주들의 관계와도 같다.


겉으로 보기엔 수십, 수백 명의 변호사가 OO로펌이라는 한 지붕 밑에서 '우리'라는 하나의 조직을 이루고 있는 것 같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이 지붕 밑에 '우리' 같은 건 없다.


이곳에서 우리는 각자 목표도, 계산도, 뻘짓도 전부 별개여서, 모두가 그냥 옆방 아저씨, 아줌마에 불과할 뿐 공통된 가치를 지향하는 동료관계란 처음부터 성립하지 않는다. 그 덕에 어떤 사람들은 "OO로펌 거기 뭐 사무실 방 장사나 하는 곳이더라."는 식의 조롱을 하기도 한다.


그러니, 다수의 변호사를 보유한 로펌에 사건을 맡길 경우, 그 많은 변호사가 다 같이 합심해서 내 사건 하나를 들여다 봐줄 것 같고, 왠지 변호사 숫자만큼의 아이디어와 능력치가 순풍순풍 뽑아져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은 큰 오산이다.


옷 한 벌 사러 쇼핑몰에 가봤자 내가 찾은 매장 직원만 관심을 가져주지 그 앞, 뒤, 옆 매장 직원까지 합심해서 내 옷 쇼핑을 도와주지는 않지 않던가.


결국, 대부분의 사건은 그 사건의 담당변호사로 지정된 변호사 외에는 아무도 내용을 모르고, 사실 별 관심도 없다.


게다가, 담당변호사로 열댓 명씩 지정되어 있더라도, 심한 경우 해당 로펌의 변호사 전부가 담당변호사로 지정되어 있더라도, 정작 그 사건의 내막을 꼼꼼히 숙지하고 재판을 비롯해 각종 실무를 담당하는 사람은 1명, 많아야 2~3명이다.


이따금씩 소송목적물의 가액이 매우 크고 다방면의 쟁점이 복잡하게 결부되어 있는 사건, 이른바 '구찌'가 큰 사건인 경우 이 팀 저 팀, 이 방 저 방 변호사들 간의 이합집산 팀워크가 이루어지기도 한다만, 이건 마치 쇼핑몰 모든 매장의 재고를 한 방에 쓸어갈 떼부자 VVIP 손님이 와서 "적당히 입을만한 옷 좀 골라달라" 했을 때  전 직원이 일시적으로 총동원되는 꼴과 같다.


VVIP 손님이 돌아가고 나면 언제 모였냐는 듯이 순식간에 흩어져 다시금 각자의 매출에 골몰하는 것처럼, 이곳에서도 지속적인 협업이나 거시적인 차원의 공동 목표 설정 같은 건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 동상이몽인 사람들이 떼로 모여 있다 해서 없던 능력이 생겨나고 있던 능력에 시너지가 생기지는 않는 것이다.


우리는 한 지붕 밑에 있지만 죄다 남의 식구들이라, 알고 보면 우리는 우리가 아니라서 그렇다.



이전 11화 한겨울의 떡장수 이야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