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생계형변호사 Mar 26. 2019

한겨울의 떡장수 이야기

찹쓰알~ 떠억~ 망개애~떠억




겨울도 다 지난 애매한 시점에 갑자기 한겨울 떡장수 이야기를 하게 된 건, 뜬금없이 매서운 꽃샘추위에 눈물을 질질 흘리다 문득 지난 겨울 겪었던 찐한 현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의 부모님 세대, 그러니까 이른바 7080 세대가 어렸던 시절 한 겨울에는 간식거리가 마땅치 않았기 때문에 이따금씩 대문 밖에서 '찹쓰알~ 떠억~ 망개에~ 떠억'을 목청껏 외쳐대는 떡장수의 목소리가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이야 뭐 겨울이고 나발이고 간식거리는 항상 넘쳐나고 찹쌀떡보다 5만 배쯤 맛있는 게 너무 많다 보니 겨울밤 골목골목을 돌며 찹쌀떡이나 망개떡을 외치는 떡행상은 상당히 보기 드문 풍경이 되었다.


그럼 그 시절 그 많던 떡장수는 지금 다 어디로 갔을까?


7080의 시절 주택가 골목골목을 누비던 떡장수들은 이제 도심 속 유흥가 골목골목을 누비고 있다.


각종 술집과 식당이 밀집한 먹자골목에서 아무렇게나 부어라 마셔라 하고 있노라면 어느 틈엔가 허름한 행색의 떡장수가 스르륵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온다.


떡장수는 고기 굽는 연기가 자욱한 가게 안을 빠른 속도로 훑은 다음, 이미 얼큰하게 술이 올라 발개진 얼굴의 손님에게 허접한 종이상자로 포장된 찹쌀떡을 내민다.


사장님 떡 하나 사세요. 맛있어요. 5천 원이에요.


상황이 여기까지 이르면, 떡장수를 제외한 가게 안의 모든 사람들은 난감하기 짝이 없다.


일단, 떡장수의 타깃이 된 얼큰한 손님은 눈 앞의 술과 고기를 놔두고 생뚱맞게 지금 찹쌀떡을 먹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렇다고 '아 거 딴 데 가서 알아보시라' 하기엔 왠지 동석한 사람들 앞에서 체면도 좀 구기는 것 같고 모양도 빠지는 것 같다(게다가 노련한 떡장수는 딱 봐도 썸띵 꽤나 가능할 것 같은 남녀가 합석해있는 테이블을 먼저 찾는다).


그러다 보면 슬슬 짜증이 밀려온다.


'떡장수는 굳이 지금, 여기까지 들어와서 나한테 왜 이래?'


얼큰한 손님이 다소간의 짜증을 섞어 배가 부르다는 둥, 치아가 영 시원찮다는 둥 궁색한 변명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고 있을 무렵, 그 옆 테이블 손님은 어쩐지 떡장수의 다음 타깃이 될 것 같은 불안감에 서둘러 잔꾀를 궁리한다.


얼마 전에 임플란트를 해서 도통 씹을 수가 없다는 핑계는 내가 먼저 하려 했는데 이미 얼큰한 손님이 써먹어 버렸고, 또 그런 핑계로 위기를 모면하자니 눈치 없는 알바가 아까 주문한 돼지껍데기를 하필 이때 가져오는 바람에 영 자세가 안 나온다.


그렇다고 어설프게 잔돈이 없다는 식으로 둘러댔다간 왠지 저 떡장수가 떡으로 거스름 돈을 챙겨줄 것만 같다.


손님들 뿐만이 아니다. 가게 주인은 주인대로 표정이 좋지 않다.


떡장수는 아무렇지 않게 남의 영업장에 들어와 버젓이 자기 물건을 팔고 있고, 어쩌다 재수로 떡 몇 개를 판다 한들 가게 주인에게는 고맙단 인사도 없이 바람처럼 자리를 떠버린다.


떡장수의 타깃이 된 손님들은 원망과 호소가 반씩 섞인 눈빛으로 가게 주인을 쳐다보며 떡장수가 던진 시련에서 구원하지만, 보는 눈도 많은데 가게 주인이 냉큼 나서서 떡장수를 쫓아내기엔 간이 작다.


그러니, 떡장수가 테이블을 종횡무진하는 동안 가게 주인은 그저 발만 동동 구르다 투덜거리는 손님에게 냉큼 콜라 서비스나 가져다준다.




그 날, 흐드러진 삼겹살 연기 속에서 동료들과 어울려 하잘 것 없는 잡소리나 지껄이던 나는 솔직히 고백건대 떡장수가 불쾌했다.


어디를 간들 이 시간에 찹쌀떡이 제대로 팔릴 리 없었지만, 아무튼 굳이 남들 먹고 마시고 노는 곳에 아무렇게나 끼어들어 제 멋대로 흥을 깨는 떡장수가 적잖이 원망스러웠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 테이블 한 구석에서 물끄러미 떡장수를 바라보던 직원 B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떡장수에게 다가가더니 만원 한 장을 내밀었다.


이미 두어 차례 떡 팔이에 실패하고 다음 타깃을 찾던 떡장수는 생각지도 않던 손님의 등장에 다소 놀란 듯했다.


하지만 이내 평정심을 되찾고, 하나에 5천 원 하는 떡이니 두 개를 주겠다며 주섬주섬 봉지를 꺼내 떡을 담기 시작했다.


B는 분주한 떡장수의 손놀림을 잠자코 기다렸다가 기어이 떡 두 개를 받아 들었는데, 떡장수는 무언가에 홀린 듯 엉거주춤한 자세로 잠시 그를 바라보다 곧 떡판을 짊어지고 가게를 떠났다.


떡장수가 사라지자 더 이상 눈치 볼 것이 없어진 손님들은 다시금 술잔을 부딪히며 끊어졌던 흥을 잇기 시작했고, 자욱한 숯불 연기와 왁자지껄한 소음으로 떡장수의 빈자리는 금세 메워졌다.


별다른 표정 변화도 없이 양손에 떡을 쥐고 자리로 돌아온 B에게 다른 직원이 물었다.


"에이 형님, 그 떡 드실 거예요? 그냥 대충 둘러대고 마시지 뭐하러 두 개씩이나 사셨어요."


사실 나도 똑같은 말을 하려다 선수를 빼앗겨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 서슴없는 B의 대답에 나는 갑자기 진한 현타를 맞게 되었고 차라리 선수를 빼앗겨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 떡 싫어해. 저 사람도 좋은 부모 만나 좋은 교육받고 자랐으면 다른 인생을 살았겠지. 날도 추운데 어디 가서 따뜻한 밥 한 끼 사 먹으면 좋잖아."


우리 테이블 사람들은 모두 숙연해졌다.


그건 평소 어지간한 쿨가이따위 양손으로 뺨을 후려칠만큼 시니컬한 B가 의외의 언행을 보인 탓이기도 했지만, 모두가 알면서도 누구나 외면하고 마 어떤 이의 속사정을 직시한 B의 용기 때문이기도 했다.




사실, 나는 조금 전 B의 돈을 받은 그 떡장수가 떡판을 진 채 편의점에 들어가 뚜껑이 빨간 소주 들고 나오는걸 똑똑히 보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솔직히 부끄러웠다.


떡장수의 처지가 딱하다고 생각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 사실 매우 쉽다.


그런데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건 아무나 할 수 없다. 사실 매우 어렵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눈치만 보는 사이에 떡장수가 딱하다는 조금 전의 생각은 이 상황이 불편하고 불쾌하다는 생각에 압도당하기 시작한다.


그럴듯한 변명거리가 생긴 마음은 어느 틈엔가 딱딱하게 굳어져서 더 이상 행동으로 옮길 무언가가 없어진다.


이 찰나와 같은 마음의 변곡점에서 B는 과감하게 행동으로 나섰으니 과연 그는 범인(凡人)이 아니다.


그날 이후, 나는 더 이상 밤거리의 떡장수를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뭐 그렇다고 내가 그날 이후로 떡장수만 보이면 쪼르르 쫓아가 떡을 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생면부지의 취객에게 불쑥 떡을 들이미는 속사정에 비하면 잠깐의 불편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이전 10화 에이... 뭐 이런 걸 다...
brunch book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오늘도 쾌변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