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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계형변호사 Jan 31. 2019

탕국찌 탕국찌 탕탕찌국찌국

인텔리빌딩 막내의 점심시간


낮 12시 소등!




내가 있는 사무실은 예전 임대 광고 글에 '최첨단 인텔리전트 시스템 빌딩'이라고 되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낮 12시 정각이 되면 사무실 전체가 자동으로 소등된다(이거 말고는 대체 어느 부분이 인텔리전트한 것인지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정오가 되기 무섭게 '팍'하고 불이 꺼지면 어두컴컴한 사무실 곳곳에서 거북이 자세로 모니터를 응시하던 사람들이 깨어난다. 반쯤 접혀있던 어깨를 펴고 부스스 일어나 안내 데스크 앞으로 모여드는 것이다. 점심시간이다. 우리 사무실의 12시 소등 기능은 마치 파블로프의 실험처럼 사무실 내 거북이들에게 밥때가 왔음을 알려주고 침샘을 빵빵 터뜨리는 엄청난 인텔리전트함을 가졌다.


하지만, 12시는 이 땅의 막내 직딩들이 시험에 드는 시간이다. "뭐 먹을래?"가 오름차순 정렬로 막내에게 전달되기 때문인데, 장담컨대 이 난제(難題)는 우주의 기원을 밝히는 것보다 어렵다. 이미 답은 정해져 있고 무한한 기출문제와 무한한 예시 답안이 있지만 막내는 결코 정답을 맞히지 못한다. 평소 "부디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라고 아무리 빌어도 매일 이런 난제를 주시는 걸 보면 신은 유독 막내에게만 관심이 없으시다.


나는 우리 팀 막내다. 우리 팀이라고 해봐야 변호사는 셋, 스텝까지 더해도 7명이 전부인데 그중 막내는 8년째 내가 맡고 있다. 어디 가서 아재 소리 넉넉히 들을 나이지만 나이로보나 이 바닥 짬으로 보나 나는 우리 팀 막내다. 그래서 12시가 되면 우리 팀 사람들은 나만 바라보는데 그 시선이 어찌나 부담스러운지 흡사 6남매를 둔 가난한 홀아비가 찬 없는 저녁 상을 차리는 심정이다. 옆 팀 막내 변호사는 아예 휴대폰 룰렛게임을 돌려서 나온 메뉴로 밀고 나간다는데 다소간의 꼰대 마인드를 갖고 보니 그건 좀 무성의한 거 같아서 곰곰이 생각은 해본다.


'그러니까, 그제는 북엇국... 어제는 김치찌개... 오늘은...'


서초동에 들락거리는 사람들은 다른 어느 동네사람 못지않게 술을 자주 많이 마신다. 법원을 가든 검찰을 가든 변호사를 찾아왔든 일단 이 동네에 일 보러 온 사람 치고 기분 좋은 사람 별로 없고 대체로 표정이 어둡다. 그래서 낮이건 밤이건 식사 때엔 소주나 막걸리 한 잔이 빠지지 않는데 한 잔 두 잔 마시다 보면 결국 술이 사람을 마시게 되고 골목 곳곳에 만취한 시루떡들이 생겨난다. 물론 시루떡들 중에는 변호사도 끼어 있다. 고객님이 울적해서 한잔, 기분 좋아 한잔 하시겠다는데 고객님 돈으로 먹고사는 변호사가 사무실에 앉아서 펜대나 굴리고 있을 여유는 없다.


그 때문인지, 이 곳 식당치고 점심때 해장 메뉴를 팔지 않는 곳은 없고 탕, 국, 찌개 중 적어도 한 가지를 주력으로 내세운다. 메뉴도 대체로 일관된 편이어서 탕은 대구탕, 생태탕, 알탕, 추어탕이 주류, 국은 북엇국, 복어국, 해장국, 순댓국이 주류, 찌개는 김치찌개, 부대찌개, 순두부찌개, 된장찌개가 주류다.


나는 그동안 숱하게 많은 12시의 시험을 치르면서 다양한 답정너 오브 답정너를 겪어보았으나 한 번도 만점을 기록한 적이 없다(사실 만점이 나올 수가 없는 시험이다). 그렇지만 그간의 경험에 근거한 선호도에 따라 '탕국찌 탕국찌 탕탕찌국찌국' 순의 메뉴 사이클을 마련해 두었고(후반부에 '탕탕국국찌찌' 같은 뻔한 반복이 아니라 '탕탕찌국찌국'이라는 베리에이션을 두는 기특함도 발휘했다), 순간적으로 머리를 쥐어짜 팀 사람들의 지난밤 음주 여부, 어제와 그제의 점심을 복기한 결과 추어탕을 천거했다.




그냥 먹을래? 갈아 먹을래?


나는 안경잡인데 요즘 같은 날씨엔 추어탕 집에 들어가자마자 안경에 김이 서리면서 뵈는게 없어진다. 백날 해봤자 소용 없는 날씨 탓을 하며 툴툴거리고 있었더니 금세 주인 아주머니가 다가와 묻는다. "어떻게 해드릴까? 그냥 잡수셔? 갈아 자셔?". 추어탕 집 메뉴라고 해봐야 둘 중 하나다. 미꾸라지가 통으로 들어있는 '통추어탕' 아니면 곱게 간 미꾸라지가 들어있는 '간추어탕'.


<두 추어탕의 차이를 대강 표현해보았다.>


나는 비위가 약한 데다가 특히 물에 빠진 생선에 취약 늘 간추어탕만 먹는다. 뱅어포를 먹을 때도 눈 마주치기가 싫어서 사선으로 집어 먹는 수준인데, 어른 손가락한 생선 다수가 눈을 부릅뜨고 둥둥 떠있는 통추어탕은 아재 만렙이 되기 전에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사실 간추어탕이라고 해서 늘 안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따금씩 미처 갈리지 못한 채 적출된 생선 눈알이 동동동 떠다니기도 하고, 훌훌 퍼먹다 입 안에서 무언가 까슬한 느낌이 들어 끄집어내면 마치 잘라낸 검지 손톱 같은 게 나오는데 이건 미꾸라지 갈비뼈다.


내가 물에서 건진 남의 갈비뼈를 들고 망연자실해 있어도 아재 만렙의 다른 손님들은 맛깔나게 잘 먹는다. 한 가지 신기한 건, 사람마다 '건더기부터 건져먹고 국물에 밥 말아먹는 스타일', '아밥 따로 탕 따로 먹는 스타일', '이것저것 따질 거 없이 뚝배기에 밥 한 공기 때려 넣고 마구 퍼먹는 스타일' 등 먹는 방법은 각자 다양해도 식사 중의 추임새는 거의 같다는 것인데, 대충 표현하자면 이런 식이다.


"후우후우", "후릅 텁 츄릅", "허어허 하하이호오오", "쩝쩝쩝", "크어허 어허"

(한 술떠서 식히고, 한 입에 털어 넣고, 입안에서 굴리며 다시 식힌 뒤, 씹고 맛보고, 삼키는 순이다. 우리말에도 중국어처럼 성조가 있으면 좀 더 실감 나는 표현이 가능할 텐데 좀 아쉽다.)


어렸을 때 우리 동네 목욕탕에 가면 가장 뜨거운 탕 위에 백두산 천지 사진이 크게 걸려 있고, 그 밑으로 두꺼비 두 마리가 입을 벌린 채 연신 뜨거운 물을 콸콸 쏟고 있었다. 당시 일요일 아침마다 목욕을 오는 초로의 아재가 있었는데 그는 적당히 샤워를 마치면 성큼성큼 열탕으로 가 천지 밑에 가부좌를 튼 뒤 두꺼비가 쏟아내는 열수(熱水)를 자신의 정수리로 받아내곤 했다. 나는 아재가 정수리에서 쏟아지는 물을 연신 내뿜으며 "커어어어"하는 기함을 토할 때마다 경탄을 금치 못하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 시절 아재의 기함은 오늘 이 추어탕 집 손님들의 추임새와 매우 흡사했던 것 같다.


이제 세월이 흘러 나도 아재가 되고 보니, 목욕탕 아재의 기함이나 추어탕집 아재의 추임새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온 몸이 새빨개지도록 뜨거워도 어허 시원하고, 입 천장이 다 까지도록 뜨거워도 어허 시원한 것이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무얼 먹었든지 이쑤시개 하나 물고 쫍쫍거리며 어슬렁어슬렁 복귀하는건 이 동네 점심시간 유종의 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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