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치앙마이는 커피가 자라고, 볶아지고, 내려지는 도시다 -
갓 볶은 원두가 분쇄기를 거쳐 나오는 소리가 들린다. 까드득, 까드득. 바리스타가 주전자를 기울이자 뜨거운 물이 원두 위로 천천히 스며들자 진한 갈색 액체가 떨어지기 시작한다. 코끝에 닿는 향은 달콤한 초콜릿과 신선한 베리가 뒤섞인 복합적인 냄새다. 커피를 한 모금 머금으면 이 도시의 호흡을 들이마신 것 같다. 치앙마이는 커피를 통해 스스로를 정의한 도시다.
치앙마이는 커피가 자라고, 볶아지고, 내려지는 도시다. 도이창, 도이수텝, 도이앙캉 같은 해발 1,200m 이상의 고산지대에서는 매년 아라비카 품종이 수확된다. 그리고 그 원두는 수천 킬로를 이동하지 않고 곧장 이 도시의 카페로 들어온다. 농장과 소비자 사이에 기계적 유통망 대신 관계가 있다. 윤리가 있고, 공동체가 있다. 이 도시의 커피는 단순한 기호식품이 아니라, 지역성과 감각, 공동체의 윤리가 어우러진 총체다.
태국 정부가 치앙마이 일대에 커피 재배를 적극 장려하게 된 배경에는 분명한 역사적,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 20세기 중후반까지 이 지역은 '골든 트라이앵글(Golden Triangle)'로 불리는 세계 최대의 아편 생산지 중 하나였다. 산악 부족들은 생계 수단으로 아편 양귀비를 재배했고, 이는 국가적 문제로 떠올랐다. 이에 1969년 라마 9세 국왕 푸미폰 아둔야뎃은 '로열 프로젝트(Royal Project)'를 통해 대체 작물 개발을 추진한다. 아편 재배를 줄이기 위한 전략이자, 산악 부족의 자립 기반을 마련하고 국경 지역의 안보를 확보하려는 정치적 선택이었다.
커피는 이 전략에서 핵심 작물로 채택됐다. 고산지대의 기후와 토양이 아라비카 품종 재배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커피는 단순한 경제 작물이 아닌, 국제시장과 연결될 수 있는 가치를 지닌 상품이었고, 이는 국가 이미지 개선과 농업 다변화 전략에도 부합했다. 결과적으로 커피는 아편을 대체한 생존 수단이자, 치앙마이와 인근 북부 지역이 국제적 커피 도시로 성장하는 기반이 되었다.
2010년, 아카족 청년 리 아유가 시작한 아카아마(Akha Ama)는 치앙마이 커피 문화의 상징이자 시발점이었다. 그의 이러한 시도는 단지 개인적 비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가 자라온 사회적 환경과 역사적 맥락에서 필연적으로 태동한 결과이기도 했다. 아편 재배로 생계를 이어가던 산악 부족의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한 왕실의 '로열 프로젝트(Royal Project)'가 커피라는 대체 작물을 통해 점차 뿌리내렸고, 리 아유는 그 변화를 직접 목격하며 성장했다. 커피는 더 이상 외부에서 주어진 정책이 아니라, 자신과 공동체의 삶을 바꾸는 실질적 도구가 되었다. 그는 커피가 도시 소비자와 소수민족 농부를 연결하는 매개체가 될 수 있다고 믿었고, 그 믿음은 실제가 되었다. 아카아마 라 파토리아(La Fattoria) 매장에 들어서면, 외벽의 벽돌 질감, 투박하면서도 정직한 내부 공간, 다양하고 특이한 스페셜 커피 메뉴 등, 모든 요소가 이곳 커피가 단지 ‘맛’이 아니라 ‘태도’ 임을 증명하는 듯하다.
치앙마이가 ‘커피의 성지’로 불리는 데는 아카아마 커피숍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 도시는 수많은 실험과 해석이 공존하는 커피문화의 집적지다. 님만해민의 리스트레토 랩(Ristr8to Lab)은 커피를 일종의 과학으로 접근한다. 이곳은 커피의 추출 온도, 시간, 그리고 커피의 진하기까지 측정해서 만들어낸다. 바리스타의 손끝은 마치 실험실 연구원처럼 섬세하다. 라테아트 세계 챔피언이 이끄는 이곳은, 치앙마이 커피의 기술적 정점이자 세계적 감각을 보여주는 대표적 공간이다. 기술과 예술, 감각과 수치가 정밀하게 결합된 장소에서 커피는 더 이상 일상적 소비물이 아니라 예술적 결과물로 재탄생한다.
치앙마이의 또 다른 커피 커피하우스는 그래프(Graph Café)다. 이곳은 커피를 내러티브로 다룬다. 작은 병에 담긴 콜드브루에는 ‘Rainy Day’, ‘Night Forest’, Graph No.18'같은 이름을 붙였다. 그 맛은 과일과 꽃, 초콜릿의 미묘한 층위를 시적으로 풀어낸다. 블랙 앤 화이트, 때론 브라운 톤으로 구성된 공간 안에서 커피는 감각적 스토리이며, 감정의 편지이자 일상적 사색이다. 마시는 행위는 곧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일이 된다.
그 밖에도 치앙마이 골목골목으로, 지역 주민이 더 자주 찾는 로컬 카페에서는 커피가 치앙마이 사람들의 일상 그 자체로 뿌리내려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여행자와 치앙마이 주민들이 함께 마시는 커피는 지역에서 자란 고산 원두로, 바리스타는 각자의 자존감을 가지고 묵묵히 커피를 내리고 그것을 전한다. 이곳에서는 커피가 거창한 설명 없이도 존재 자체로 충분하며, 지역의 감각적 삶과 하나로 어우러진다. 이곳은 특이하게도 야시장에 곳곳에 커피 가판대가 스며져 있다. 바리스타들 각자의 멋과 풍미를 지니고 자신만의 커피를 전한다.
치앙마이의 커피는 이렇듯 다층적이다. 그런데도 놀랍게도, 다른 국가들처럼 대규모 프랜차이즈 체인이 도심을 장악하지 않았다. 이 현상은 단순히 시장 규모의 차이나 관광객 수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치앙마이 커피 문화가 '속도와 확장'이 아닌 '관계와 정체성'을 우선하는 토양 위에 자라났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카아마를 비롯한 많은 로컬 카페들은 대형 프랜차이즈화 보다는 로스팅 품질과 커뮤니티 기반 운영을 고수해 왔다. 이것은 로열 프로젝트의 가치와도 일맥상통한다. 상향식 확장보다는 지역 공동체의 자립과 자율성을 중시하고, 농부의 이름이 소비자에게 도달하는 관계의 가치를 우선시하는 태도. 빠른 확산보다 지속 가능한 순환을 택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토록 이상적인 커피 문화가 어떻게 치앙마이에 정착할 수 있었던 걸까? 단지 로컬 시민들의 자발적 호응만으로 설명되기엔 불충분하다. 치앙마이 커피문화의 지속성과 확장은 크게 세 가지 요인에 기반한다. 첫째는 국가의 체계적 인프라 지원이다. 로열 프로젝트 이후 태국 농업청, 무역부, 왕립대학 등의 기관이 커피 품종 개량, 수출 연계, 커피 관련 직업훈련 등 다층적 지원을 지속해 왔다. 농업을 단순 생계 수단이 아니라 고부가가치 문화산업으로 전환시키는 흐름은 정책적으로도 뒷받침되었다.
둘째는 치앙마이라는 도시의 정체성 변화다. 2000년대 이후 치앙마이는 디지털 노마드와 대안 여행자들의 메카로 떠올랐고, 이들은 빠른 소비보다 느린 취향, 프랜차이즈보다 독립 공간을 선호했다. 카페는 단순한 음료 판매점이 아닌, 지역성과 삶의 태도를 반영하는 감각적 거점이 되었다. 셋째는 국제적 네트워크와 교육의 역할이다. 아카아마의 리 아유를 비롯해 치앙마이의 커피 리더들은 스페셜티 커피 협회(SCAA)와 같은 국제 플랫폼에서 지속적으로 교류했고, 자체적인 워크숍과 페스티벌을 열며 '지속가능한 커피 문화'에 대한 교육과 대화를 이어왔다. 이는 단순히 지역 안에 갇힌 문화를 넘어서 글로벌 감각을 유입시키는 장치로 작동했다.
이러한 흐름이 쌓여 치앙마이는 프랜차이즈 커피의 파편화된 확장이 아니라, 뿌리 깊은 문화적 고유성을 유지하며 동시에 국제적 품질 기준과도 호흡하는 드문 도시로 성장한 것이다. 여기에 더해, 유럽을 비롯한 국제 관광객과 디지털 노마드들의 유입은 치앙마이 커피 문화의 정착과 확산에 결정적 촉진제가 되었다. 치앙마이는 오랜 기간 저렴한 생활비, 쾌적한 기후, 안정적인 인프라로 인해 세계 각국의 장기 체류자들을 끌어모았다. 특히 유럽 출신의 디지털 노마드들은 '좋은 커피'를 단지 기호가 아닌 삶의 방식으로 여겼고, 이는 치앙마이 카페들이 고품질의 원두, 정교한 로스팅, 감각적 공간 구성에 집중할 수 있는 강력한 수요 기반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커피를 일종의 문화 콘텐츠로 소비하며, 단순한 음료가 아닌 '로컬의 미학'을 경험하고자 했다.
치앙마이에서 커피는 사람들의 감각과 사유를 연결한다. 일상과 윤리를 잇는 조용한 지도다. 여행이란 결국 낯선 곳에서 발견하는 익숙한 것들이다. 그리고 익숙한 것에서 발견하는 낯선 의미들의 연속이다. 치앙마이의 커피는 바로 그런 발견의 매개체였다. 한 잔의 커피 속에 담긴 것은 단순한 맛이 아니다. 공동체가 스스로를 지키고 성장시키는 방식에 대한 조용한 이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