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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입고 걷는 골목, 치앙마이 빈티지 감성 문화

- 빈티지 도시 치앙마이, 시간을 입다 -

by 마르코 루시

치앙마이 라차웡 로드( (Ratchawong Road)의 금요일 오후. 볶은 커피 원두의 고소함과 오래된 면직물에서 피어오르는 세월의 향기가 뒤섞인다. 담쟁이넝쿨을 따라 벽면을 타고 흐르는 눈부신 햇빛 사이로, 빈티지한 간판이 여행자를 유혹한다. 골목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 순간 발길이 멈추는 곳이 있다. 마네킹 위에 얹힌 태국풍 하와이안 셔츠, 바랜 리바이스 청재킷, 누런 폴라로이드 사진이 함께 진열된 공간. 손끝으로 전해지는 빈티지 데님의 거친 질감. 한때는 누군가의 청춘이었을 그 옷들이 지금은 조용히 다음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이곳, 치앙마이는 단지 빈티지를 파는 도시가 아니다. 시간을 입고, 취향을 걷는 도시다.


이 도시에서 빈티지숍은 더 이상 특별한 구석에 숨겨진 '소수의 취향'이 아니다. 마치 카페처럼, 편의점처럼, 너무도 자연스럽게 골목마다 존재한다. 심지어는 야시장과 주말 플리마켓에서도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이 '오래된 것들'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왜 치앙마이에선 빈티지가 문화가 아니라 일상이 되었을까? 먼 옛날 멩라이왕이 이곳을 '새로운 도시'로 명명했지만, 실제로는 오래된 것들을 소중히 여기는 도시를 만들었다. 란나 시대부터 대나무를 깎고 닥종이에 그림을 그리던 장인들의 수공예 정신이 있었다면, 지금은 그 손길이 빈티지 옷을 고르고 진열하는 젊은 셀러들로 이어지고 있다.


이 도시의 리듬은 언제나 느렸다. 전통 목공예, 도자기, 실크 직조, 대나무를 깎는 장인의 손끝에서 나무 부스러기가 떨어지고, 등나무를 엮는 소리와 물레가 돌며 실이 뽑히는 소리가 골목에 울린다. 이곳의 수공예 문화는 오랜 시간을 들여 완성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런 도시에서 새것의 반짝임보다, 오래된 것의 깊이에 매혹되는 감각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치앙마이 사람들은 유행을 입지 않고, 태도를 입는다. 그래서 빈티지는 이 도시의 삶의 방식에 딱 들어맞는다. 낡은 옷 한 벌에도 이야기가 있고, 헌 모자 하나에도 계절이 깃들어 있다.


동시에, Z세대와 밀레니얼 세대의 소비 감각이 이 문화를 밀어 올린다. 브랜드 로고보다 고유한 감성을 중요시하고, 트렌드보다 독립적인 스타일을 선호하는 이 세대는 빈티지를 '패션'이 아니라 '취향의 언어'로 받아들인다. 치앙마이대학교, CMU More Space에선 매일 저녁 빈티지 옷들이 플리마켓을 가득 채운다, 형광등 불빛 아래서 흥정이 시작되고, 스마트폰 플래시가 번쩍이며 옷을 비춘다. 그들에게 빈티지란 '가격이 저렴한 옷'이 아니라, 자신을 표현하는 가장 창의적인 방식이다. 흥미롭게도, 개성을 추구하는 이들의 모습이 묘하게 비슷해 보인다는 역설도 발견된다. 서로 다른 나라에서 온 젊은이들이 비슷한 빈티지 룩을 완성하고, 같은 각도로 스마트폰을 들어 SNS에 올리는 모습을 보면, 이 개성이란 것도 결국 공유된 시대감각 위에서 형성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건, 빈티지가 도시의 마켓 문화와 완벽하게 결합되었다는 점이다. 찡짜이 마켓, 선데이 워킹 스트리트, 와로롯 시장, 님만의 골목 시장까지. 거의 매일 어딘가에서 열리는 시장마다, 최소 하나 이상의 빈티지 부스가 존재한다. 저비용 창업이 가능하고, 공간과 시간의 제약이 적은 '셀러 친화적 구조'가 이를 가능케 한다. 스스로 옷을 고르고, 재정비하고, 진열하는 청년 셀러들은 시장을 단순한 판매장이 아닌 자기표현의 무대로 만든다. 그 결과, 치앙마이에서는 '시장'이란 단어가 단순히 음식을 사고파는 장소가 아닌, 의식주와 미감, 태도와 철학이 만나는 플랫폼이 된다. 음식 옆엔 향초가 놓이고, 그 옆엔 오래된 엽서와 레코드판이 진열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매만지는 이들의 손끝엔 시간이 묻어 있다.


해가 기울 무렵, 한 빈티지숍의 유리창 앞에 멈춘다. 창 너머에서 한 여행자가 거울 앞에 서 있다. 빈티지 데님 재킷을 입어보며 고개를 갸웃한다. 그 순간, 가게 안의 모든 소음이 잠시 사라지는 것만 같다. 어쩌면 그는 지금 옷을 고르는 게 아니라, 기억을 입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옷이 어떤 시절을 지나왔는지, 누구의 여름을 통과했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그 감각에 매혹된다. 이유는 단순하다. 치앙마이에서는 모든 옷이 이야기고, 모든 골목이 박물관이기 때문이다.


치앙마이 중심부의 라차웡 로드 일대에 걸어서 10분 남짓한 거리 안에만 일곱 개 이상의 독립 빈티지숍이 줄지어 서 있다. Sgoontong Vintage, Lucgygirl's House of Vintage, OMG Team Shop, Deen Dee Vintage, Wear2here, Vintage Wings, 각 가게는 저마다 다른 시대의 온도와 다른 취향의 정서를 안고 있다. 누군가는 핑크빛 조명 아래에서 플라워 패턴 드레스를 고르고, 또 누군가는 낡은 나무문 너머에서 미군 군복풍 셔츠를 만지작거린다. 과거는 낡은 것이 아니라, 여전히 입을 수 있는 아름다움으로 이 거리 위에 살아 있다. 이 거리의 밀도는 단순한 유행이 아니다. 이는 도시 내부에 축적된 문화적 감수성과 공간적 실험 정신이 외형화된 결과다. 문화적 실험이 가능한 저렴한 공간, 다양한 국적의 셀러와 소비자, 리사이클 경제를 존중하는 지역성. 모든 요소가 맞물리며 라차웡 로드는 지금, 치앙마이 빈티지 문화의 현장적 상징이 되어간다.


치앙마이를 다시 찾는 여행자들은 이제 알고 있다. 캐리어에 여유 공간을 남겨두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라차웡 로드에서 만나게 될 자신만의 빈티지 스토리를 위해서다. 그 거리를 걸으며 깨닫게 되는 것은 시간을 입는다는 것이 얼마나 자연스러운 일인지, 그리고 진정한 여행이란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함께 걷는 방법을 천천히 배워가는 과정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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