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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어나 Jan 08. 2024

이사가 슬프기도 하군요.


1997년. 전셋집만 전전하던 우리에게 우리 집이 생겼다.

엄밀히 온전한 우리 집은 아니었지만, 엄마의 기세대로라면 곧 우리 집이 될 것이 뻔한 은행과 지분을 나눈 우리 집이었다.


한참 엄마가 집을 보러 다닐 무렵 엄마는 아빠와 오빠와 나를 불러 놓고 좀 더 넓은 평수의 오래된 아파트와 좀 좁기는 하지만 새 아파트 중 무엇이 더 좋으냐 물었고, 우린 사전에 모의한 적도 없건만 이구동성으로 "새 아파트!!"를 외쳤다.


단칸방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한 엄마 아빠에게는 18년 만에 드디어 전세생활을 청산할 수 있었던 거고, 나에게는 이사 가면 드디어 침대가 생긴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흥분되는 것이었다. 중1의 나이가 침대 하나에 흥분하기엔 충분히 많을 수도 있지만 더 이상 아침마다 이불을 개키지 않아도 되는 공간이 생긴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얼마나 흥이 났는지 모른다. 물론 이불을 개키지 않아도 되는 것 이상으로 침대는 어찌 눕기만 하면 포근하게 나를 감싸 안아 쥐고 단박에 꿈나라로 데리고 가는지 기대 이상이었다.


첫 입주라 모든 게 새것인 이 아파트를 둘러보러 왔을 땐 여기서 앞으로 우리가 살게 될 것이라는 게 쉬이 믿기지 않았었다. 그전까지 살던 집들과는 외관부터 달랐고, 현관으로 들어섰을 땐 온통 하얗게 마감된 벽이 그동안 새로 도배를 하고 들어갔어도 왠지 누추해 보이던 전셋집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게 눈이 부셨다. 4층이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물론 모두가 8층의 소위 로얄층을 원했건만, 고소공포증이 심한 엄마가 베란다에서 김치를 담그고 싶다는 로망이 있기에 적절히 타협한 층이었다. 2층이나 3층이면 엘리베이터를 타기 눈치가 조금 보이기도 하건만 4층 정도면 응당 엘리베이터를 타야 한다는 생각이었기에 그 적절한 층이 또 썩 마음에 들었었다. 늘 1층에만 살던 우리에게 4층의 엘리베이터를 타야만 오를 수 있는 우리 집은 우리 신분이 바뀐 듯 나에겐 꽤나 큰 쾌감을 주었다.


방이 총 3개인 아파트라 안방을 제외하고 오빠와 나에게 방을 고르는 시간이 주어졌다. 방은 좁 더 작지만 천장이 야광벽지인 방이 내 방이 되었다. 중1 여자애가 갖기엔 어쩐지 유치하지만 고2 한참 사춘기소년이 갖기에도 그 방은 적합하지 않아 내 방이 되었지만, 사실 그 천장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가족들에게 나도 이런 야광벽지는 하나도 새롭지 않다고 마지못해 그 방을 쓰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전에 없던 야광벽지라니 그 모양이 무어건 간에 그저 좋았다. 실제 그 방에 들어가 살게 되었을 적엔 자려고 불을 껐다가 야광 벌룬들이 한창 두둥실 날아다니는 것을 보며 나도 한껏 몽환적이었다가 이내 사그라들면 껐다 켰다를 여러 번 반복했으니 사실 그건 흥미가 사라지기 전까지 나에겐 매일 밤 부푼 꿈같은 것이었다.


엄마는 오빠가 새언니를 인사시킬 때도, 내가 신랑을 인사시킬 때도, 오래된 아파트가 못내 걸렸는지 괜스레 없이 사는 집에 부르는 게 조심스럽다고 했지만, 나는 앞으로 우리랑 평생 살 사람에게 우리가 살아온 모습을 그대로 보여줄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나중에 새언니랑 신랑이랑 다 있는 자리에서 우리만 살았던 그 집 이야기를 할 때 각자 상상의 나래를 펼칠 게 아니라 다 같이 같은 공간을 떠올릴 수 있는 사실이 어찌나 좋았는지 모른다. 오죽했으면 이미 엄마의 세간으로 가득한 내 방으로 신랑을 데려가 불을 껐다 켰다 하면서 내가 젤 좋아하는 공간이라 소개했을까. 그런 의미에서 내가 서울로 가자마자 방 주인 허락도 없이 방을 없애 버린 야박함에 뜨악하기는 했다. 고향집에 여전히 제 방이 버젓이 그대로라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 엄마는 얼마나 딸의 독립을 바란 건가 싶어 괜스레 서운해지는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으니 말이다.



올해 5월이면 이제 이 집을 비워야 한다. 재개발이 확정되었기 때문이다.

집은 곧 헐릴 것이고 우리 가족의 켜켜이 묻은 추억도 기억 저편으로 아스라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주변의 모교도 재건축되거나 혹은 헐어지고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섰음에도 여전히 낙후되어 내가 처음 2살 때 이사 온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이곳. 뻔질나게 옆집 앞집을 드나들면서 이웃 간에 아이들 커가는 모습을 다 지켜봐 왔던 곳. 골목만 나가면 동네 친구들과 하루 종일 밥때가 되어 흩어질 때까지 마냥 놀 수 있었던 곳. 나에겐 여기가 고향이었다. 이제 5개월 후엔 나는 어느 공간을 떠올리며 고향집으로 향해야 할까.


우리는 이 집으로 이사 올 때 그 간의 고생이 모두 보상받고, 앞으로는 새하얗고 눈부신 이 집만큼이나 밝은 앞날만 우리를 비출 거라 믿었다. 엄마는 아빠의 건강을 위해 숱하게 하던 이사에 종지부를 찍으며 아빠가 건강하기를 바랐고, 아빠는 이제 막 오픈한 국밥집이 잘 되어 이제는 더 이상 아프지 않고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지고 싶었을 테고, 철없는 우린 그저 이 행복이 오래도록 이어질 줄 착각했다.


아빠는 이 좋은 집에 고작 3년만 머물렀다.

더러 엄마가 힘들어 보일 땐 아빠 제사를 그만 지내면 좋겠다고 우리도 남들처럼 명절엔 여행이나 다니자고 부추겼다. 항상 다 누리지 못하고 먼저 간 사람이 젤 짠하다는 우리 엄마 지론으로 엄마는 지극정성으로 아빠 밥만큼은 잊지 않았다. 이제 이 집을 떠나야 한다니 일 년에 설, 추석, 그리고 제삿날이나 한 번씩 받아먹던 밥상도 기껏 차려나 봐야 아빠가 이사 간 집을 찾아올 수는 있을지 걱정은 왜 되는 건지.


아빠가 가고 얼마 안 된 밤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이사를 가더라도 아빠 제삿날에는 이사 가는 집이 어디라고 알려주고 가야 하니 우리 이사는 무조건 아빠 제사를 지낸 후여야 한다는 생각. 길치인 엄마랑 오빠랑 달리 길눈이 밝으니 어디라도 우릴 찾아올 것 같지만, 어쩐지 우릴 보러 왔다가 다른 이들이 사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망연자실할까 그게 괜스레 걱정이 되었달까.


이미 아빠의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 않은 집이건만, 집이 없어진다고 우리의 기억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건만, 아랫집에 누수를 여러 번 물어주고 난 후에는 차라리 이사를 가자고 엄마를 그렇게도 닦달한 집이건만, 이제는 갖은 핑계로도 더 이상 머물 수 없게 되니 엄마가 그동안 아빠가 떠나고도 20년이 넘도록 이 집을 지키고 있었던 이유를 왠지 알 것도 같은 마음이 왜 이제야 드는지 알량하다.  


잠든 엄마 옆에서 괜스레 눈시울을 붉히며 가슴에 오래도록 묻힌 어떤 의미에 작별인사를 고하고 있다. 원래도 의미부여를 좋아하는 나라서 어떤 것을 보낼 때 치르는 의식 같은 거라 이렇게 몇 번 울고 나면 마음속 미련도 조금씩 씻겨 내려가 이내 좀 괜찮아지는데, 이사를 앞두고 눈물바람이 부끄러워 어디 말도 못 하고 혼자서 이 의식을 치르고 있다.


우리 집의 얼기설기 얽힌 역사가 진짜 눈앞에서 사라질 날이 머지않았다. 진짜 경치 좋은 곳에 외따로 놓여 있는 시골집 같은 푸근한 고향집은 아니었어도, 참기름 짜는 집도 있고, 건강원도 있고, 계란만 따로 파는 집도 골목 따라 켜켜이 묵은 모습 그대로 지키고 있던 이 고향을 오래도록 기억 속에 부여잡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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