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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상우 Jul 12. 2018

극한직업, 그 이름은 주부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아침 7시. 아내는 애들을 잘 부탁한다고 이야기하고 휘리릭 사라졌다. 아내가 출근하고 나니까 전혀 준비되지 않은 주부로서의 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아내에겐 호기롭게 요리를 포함한 집안일에 대해서 일체 신경 쓰지 말라고 큰소리를 쳤으나 집안일이라고는 거의 해본 적 없는 대한민국의 전형적인 중년 아저씨가 무슨 용빼는 재주가 있다고 갑자기 주부로 변신하겠는가.


사실 제네바에 오기 전 미리 요리학원에 다니면서 요리의 기본이라도 배우고 오려고 생각은 했지만, 주말도 없이 매일 이어지는 야근 때문에 결국은 요리학원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였다. 주부의 역할에 대한 사전 지식이나 훈련 없이도 닥치면 할 수 있으리라 막연하게 생각하고 제네바에 온 것이었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주부를 만만하게 본 것이다. 이라크에 파병한 자이툰 부대 내 연락사무소에 파견되어 AK-47 소총으로 무장한 개인 경호와 함께 이라크 북부 지역을 종횡무진 다닌 적도 있었고, 수도 한복판에서 시가전이 발생하여 수백 명이 죽은 지 불과 몇 달도 지나지 않은 콩고에 발령받아 대사관을 창설한 적도 있었다. ‘설마 주부가 이보다 더 극한 직업일까’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제네바에 왔고, 이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되었다.


스위스 제네바라는 곳이 한국 주부들의 무덤으로 악명을 떨치는 곳이라는 것도 제네바에 도착한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일단 물가가 어마어마하게 비싸서 외식은 거의 꿈도 못 꾼다. 한식당이 몇 군데 있으나 김치찌개가 3만 원 수준이다. 마트에서 파는 정말 볼품없는 초밥 세트도 2만 원대이니 말 다 했다.


사실상 매끼를 집에서 해결해야 하는데, 제네바에는 한국 식료품점이 없다는 게 제일 문제였다. 그리고 인건비가 워낙 비싼 곳이기 때문에 집 안 수리, 정원 가꾸기 등 웬만한 것은 내가 직접 몸으로 때워야 한다. 모든 가게는 평일 7시면 다 문을 닫고, 주말 중 일요일은 아예 문을 열지 않는다. 긴 겨울에는 해가 엄청나게 짧아져서, 온종일 햇빛 구경도 할 수 없다. 그래서 주부 우울증에 걸리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나마 한국 부인들끼리는 가깝게 지내는 친구들도 생기고, 서로 이런저런 정보를 교환하고 의지하면서 위기를 극복하지만, 남자 주부인 나는 외톨이였다. 사무실과 달리 인수인계서도 없고, 옆에 앉아 있는 동료 직원도 없고, 옆의 과에 전화해서 업무협조를 부탁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서울에 계신 친정(?)어머니에게 전화해서 뜬금없이 살림살이에 대해 궁금한 것들을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직원 부인들한테 전화해서 물어보는 것은 더더욱 말도 안 되는 노릇이었기에 완전 대책 없는 주부가 되었다.


가장 시급한 것은 역시 애들 밥을 해 먹이는 것이었다.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인터넷에 묻고 찾아보면서 무작정 요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인터넷에서는 자꾸만 스위스에 구하기 힘든 재료들을 쓰라고 했다. 도대체 미림, 참기름, 매실즙을 어디서 구할 수 있는 건지.


일단 가장 손쉽게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고기 굽기와 달걀 후라이 같은 것으로 요리를 시작했는데, 생전 안 해보던 칼질을 갑자기 하니까 거의 매끼 손가락을 벴다. 딴에는 요리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도구부터 좋은 것을 써야 한다는 생각에 아주 잘 드는 쌍둥이표 칼을 샀다.


애들은 배고프다고 보채는데, 맘만 급하고 손놀림은 전혀 따라주지 않으니까 그 잘 드는 쌍둥이표 칼로 사정없이 내 손가락을 베었다.


한번은 제대로 엄지를 베어 피가 멈추지 않았다. 손가락을 휴지로 감싸고 구급약 박스를 찾아 집 안을 헤매는데, 피는 멈추지 않아 바닥 여기저기에 뚝뚝 떨어졌다. 병원에 가서 꿰매야 할 것 같은 상처였다. 그러나 애들은 계속 밥 언제 주냐고 보채고, 아내도 퇴근 후 집에 올 시간이 거의 되어 가서 대충 반창고를 붙이고, 손수건으로 손가락을 싸맨 후 계속 밥을 했다.


아내가 퇴근하고 집에 들어와서는 흡사 유혈이 낭자한 사건 현장을 본 것처럼 기겁하였다. 바닥 여기저기에는 선명한 핏자국이 있었고, 구급약 박스를 찾기 위해 온 집 안을 헤맨 탓에 집 안 서랍은 다 열려 있었다. 나는 피로 시뻘게진 손수건으로 왼손을 감싼 채 아내를 맞이했다.


그때 깨달은 것이 주부는 아프면 안 된다는 것. 병원에 가서 손가락 치료를 받고 나서, 그다음 날도 어김없이 주방 일을 해야 했다. 배고픈 애들 밥을 먹이기 위해서 말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갑자기 시작한 물일로 인해 손끝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주방 일 할 때는 고무장갑을 반드시 써야 한다는 것을 들어서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실제 주방 일을 하다 보니 고무장갑을 꼈다 뺐다 하기를 반복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마저도 나중엔 귀찮아서 장갑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스위스 특유의 건조하고 추운 겨울 날씨에 계속 맨손으로 물일을 하니까 결국 손이 배기지 못했다. 어느 날부터인가는 손을 물 가까이 데기만 해도 마치 염장 지르는 것 같이 참을 수 없이 아팠다.


그러나 주부는 배고픈 애들을 위해 계속 밥을 해야만 하기에 여기저기 갈라지고 칼자국투성이가 된 손으로 주방 일을 계속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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