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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상우 Jul 19. 2018

본격적인 안사람 되기

제네바에 발령받아서 오는 외교관이나 주재원 중에는 아이를 국제학교에 보내는 경우도 있고, 공립 스위스 학교에 보내는 경우도 있다. 제네바 지역의 스위스 학교는 불어를 쓰기 때문에 영어를 배워야 하는 초등학교 고학년 이상은 대부분 국제학교에 다니는 걸 선호하는 편이다. 그런데 우리 집은 첫째 영민이가 저학년인 만큼, 굳이 비싼 국제학교에 다닐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무료인 공립 스위스 학교에 보내기로 했다.


공립 학교는 거주지 기준으로 배정되는데, 마침 집에서 도보 10분 거리에 우리 동네 유일한 초등학교인 Chavannes-de-Bogis 초등학교가 있었다. 첫째 영민이는 이 초등학교에 배정받았다. 스위스 초등학교는 만 4세에 입학한다. 우리로 치면 유치원 마지막 2년이 초등학교 1, 2학년이 되는 셈이다. 1~2학년은 합반으로 생활한다. 영민이가 배정받은 초등학교는 6학년(한국 기준 4학년)까지 있었다. 한 학년당 학급이 1~2개 있고, 학급당 15~20명 정도로, 전교생이 100명이 채 안 되는 아주 조그마한 학교였다.


둘째 정민이는 만 3살밖에 안 되어서 동네 어린이집에 등록했다. 국공립 어린이집은 비용이 매우 저렴하지만, 자리가 나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그런데 어차피 둘째는 어린이집을 3달 정도만 다니고 나면 8월에 초등학교에 입학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집 주변 사립 어린이집에 보내기로 했다.


스위스 도착하고 일주일 정도 지나서 둘째가 먼저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했다. 한국처럼 당연히 어린이집에서 급식까지 해줄 것으로 생각했는데, 웬걸. 점심은 각자 도시락을 싸 와야 했다. 상처투성이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고 한숨을 내뱉었다. 아! 아침에 도시락까지 싸야 한다니.


그런데 정작 나를 절망의 구렁에 빠트린 것은 첫째가 다니기 시작한 스위스 학교였다. 첫째 영민이를 학교에 데려다준 첫날, 당연히 학교에서 급식을 제공할 것으로 예상하고 담임 선생님에게 급식은 어디에 신청하는지 물어보았다. 선생님은 ‘이 사람이 정말로 스위스 학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구나’라는 표정으로 나를 보면서, 급식은 학교에서 주는 것이 아니라 학생 돌봄 서비스를 제공하는 UAPE(학생돌봄센터)라는 공공기관에서 시행하는 것이라고 알려줬다.


UAPE는 한마디로 학생들의 급식과 방과 후 돌봄 서비스를 제공하는 공공기관이다. 스위스 초등학교는 점심을 각자 집에서 먹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러나 부모가 맞벌이거나 집에서 점심을 먹을 수 없는 정당한 사유(예를 들어, 구직 중이거나 학생인 경우)가 있으면 학교에 급식을 신청할 수 있다. 아울러 방과 후 돌봄 서비스도 최대 저녁 6시까지 제공하는데, 이것도 부모가 정당한 사유로 학교가 파하는 시간에 아이를 돌볼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당장 UAPE에 찾아가서 내가 연수생 신분임을 밝히고, 급식을 신청하려고 하니까 학기 초에 신청 받은 만큼만 준비 인원을 고용하고 급식 준비를 하므로 학기 중간에 추가로 신청 받을 수 없다고 했다.


이처럼 애들이 학교에 나가기 시작하면 좀 여유가 생길 것이라고 기대했던 내 희망은 처참히 부서졌다. 결국, 학기가 끝나는 6월 말까지 넉 달간 하루 네 끼(둘째 도시락과 아침, 점심, 저녁)를 차리는 신세가 되었다. 게다가 스위스 학교는 수요일에 오전 수업만 하기에 난관은 높기만 했다.


주방 일이 익숙하지 않아서 한 끼 차리는 데 최소한 한 시간 이상 걸렸는데, 아침에 도시락까지 싸야 했기에 나의 하루는 새벽 6시에 시작되었다. 아내가 아침을 같이 하겠다고 제안도 했지만, 괜한 자존심에 허락하지 않았다. 또 현실적으로 아내가 일어나면 애들도 다 같이 깨게 되기 때문에 애들을 최대한 재우기 위해서는 아내가 더 자는 편이 도움되기도 했다.


아침에 아내가 출근하고, 애들을 학교 보내고 나면 대략 8시30분. 첫째 영민이의 오전 수업이 끝나는 11시30분까지 자유 시간이었다. 정말 1초가 아까운 피 같은 시간인데, 이때 부리나케 집 안을 청소하고 빨래도 돌리고, 장도 보면서 점심 준비까지 해야 했다.


게다가 제네바에서의 첫해는 내가 연수생이었기 때문에 공부까지 병행해야 했다. 다행히도 내가 했던 전문연수 과정은 수업을 듣고 시험을 보는 것이 아니라, 1년 연수 종료 후 연구 과제를 제출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시간을 자유롭게 관리할 수 있었으나,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는 연수기관에 가야만 했다.


11시30분 학교에 가서 영민이를 집에 데리고 온 후 점심을 먹이고 다시 1시30분에 맞춰서 학교에 데려다주었다. 그리고 나면 학교가 파하는 3시10분까지 나의 2차 자유 시간이었다. 이때 오전에 미처 못한 집안일을 마무리했다.


소심한 첫째는 내가 1분이라도 늦게 데리러 오면 바로 울기 시작했다. 그래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11시30분, 3시10분까지 학교에 도착해야만 했다. 나의 일상은 철저하게 영민이 점심시간, 학교 파하는 시간에 맞춰서 돌아갔다. 때로는 매일 대통령 행사하는 것도 아니고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항상 학교까지의 예상 소요 시간과 도착 시각을 계산하면서 살았다.


주부 생활의 초창기에는 오전 시간 마트에 가서 필요한 먹거리와 생활용품을 열심히 카트에 담아 계산대에서 기다리는데, 하필이면 내가 줄을 선 계산대가 좀체 줄어들지 않아 당황했던 적이 종종 있었다. 11시30분까지 학교에 가려면 주차장까지 달려가는 시간을 포함해서 아무리 늦어도 최소한 11시15분에는 마트에서 나가야만 했다. 11시13분이 되어서야 내 앞사람이 계산을 시작하게 되면 그 몇 분을 사이에 두고 고뇌에 찬 햄릿이 되었다.


‘그냥 눈 딱 감고 5분 정도 늦게 갈까. 아니면 열심히 담은 카트를 과감하게 버리고 일단 영민이를 데리러 갔다가 오후에 다시 마트에 올까.’


맘 독하게 먹고 영민이한테 좀 늦게 가더라도 마저 장을 보고 가는 편으로 결정을 내리려는 순간, 가뜩이나 새로운 학교에 적응하지 못해서 외톨이로 지내는 아들의 우는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아! 어쩔 수 없다. 타협책으로 카트를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잘 다니지 않는 자동차용품 코너 같은 데 숨겨놓고 일단 학교로 갔다. 오후에 마트에 다시 와서 자동차용품 코너에 숨겨놓았던 내 카트를 찾아보지만, 이미 점원이 갖고 가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3시10분에 영민이를 데리러 학교에 갔다가 어린이집에 들러서 정민이를 픽업하면 대략 오후 4시가 되었다. 아들들과 동네 놀이터에서 놀다가 집에 5시30분 정도에 돌아와서 저녁을 차리기 시작했다.


바깥양반(아내)은 특별한 일이 없으면 7시에서 7시30분 사이에 집에 왔는데, 초창기에는 정말 바깥양반이 퇴근해서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만일 그날 아내가 담당하는 회의가 늦게 끝나거나 서울에서 출장단이 와서 저녁 회식이 생기면 결국 내가 애들 저녁을 먹이고, 같이 놀고, 재우는 것까지 풀로 다 뛰느라 멘붕이 왔다.  

“무슨 전쟁이 터진 것도 아닌데, 괜히 집에 와서 애 보기 싫으니까 야근하는 거 아냐”

내가 한국에서 매일 야근하던 수년간의 세월은 까맣게 잊은 채 야근하는 아내를 원망하기 바빴다.  


애들을 재우고 나서도 나의 일과는 끝나지 않았다. 다음 날 먹을 것을 미리 챙겨야 하기 때문이다. 국을 미리 끓이고,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찬거리도 만들어놓아야 했다. 그리고 연수생으로서 연구 과제도 수행해야 했다. 아이들이 다음 날 입을 옷과 책가방, 간식 등을 챙기는 것을 끝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엄마가 항상 집에서 가장 늦게 자고 가장 일찍 일어나야 하는 이유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정말 과장 하나 안 보태고 주부로 살다 보니까 사무실에서 일할 때와 달리 커피 한 잔 마실 시간조차 없었다. 회사처럼 출퇴근 시간이 따로 정해진 것도 아니다. 눈뜨는 시간이 출근이고, 잠드는 시간이 퇴근이었다.


결국은 몸에 탈이 났다. 주부로 변신한 지 한 달 정도 지나고 나서 예전의 목디스크가 재발하고, 어깨에 담이 걸려서 침대에서 일어날 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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