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로 출국할 당시 만 3살, 6살이던 아들 두 놈을 데리고 제네바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제네바 주재 대한민국 대표부에 먼저 발령을 받은 아내는 집을 구하고 기본적인 준비를 하기 위해 이미 2주 전에 혼자 출국했고, 나도 곧이어서 제네바 연수 발령을 받아 애들을 데리고 제네바로 떠나게 되었다.
아들 둘과 나까지 합해서 3인분의 핸드캐리를 해야 하므로 남다른 각오로 공항에 갔는데, 우려했던 대로 스위스에서 당장 필요한 것들을 꾸역꾸역 쑤셔 넣은 가방이 용량 초과가 되었다. 체크인 카운터에서 짐 가방 전부를 다시 풀어헤친 후, 무게가 나가는 것들은 빼고 다시 쌌다. 결과적으로 거의 5인분의 핸드캐리를 해야 했다. 이에 더해 유모차와 아이들 카시트까지 갖고 가야 했다.
유모차 손잡이에 카시트를 걸고, 유모차 수납공간에 애들 담요와 베개를 넣고, 짐을 두 팔에 최대한 주렁주렁 걸었다. 거기에 작은놈은 유모차에 앉히고, 큰놈을 몰면서 보안검색대를 통과해 비행기 타는 게이트까지 향하는 나의 모습은 영락없는 피난민이었다. 세 식구 중 하나가 화장실을 가야 하면 셋이 다 함께 그 모든 짐을 다 이끌고 화장실로 가야만 하는 운명 공동체였다.
일부러 꾀를 부려 출발 시각이 자정인 비행기 표를 샀는데, 아이들이 스스르 잠들기는커녕 환승지인 암스테르담까지 11시간 동안 거의 잠을 못 자고 이코노미석에서 계속 몸부림을 쳤다. 주변 사람에 방해되지 않게 애들을 달래고, 어르고, 혼내고, 읍소하고, 웃기고, 놀아주고. 사탕과 초콜릿 등 각종 뇌물을 주기도 하고, 온갖 진기명기 쇼까지 하면서 11시간을 버텨냈다. 그 와중에 비행기 안에서도 한 사람이 화장실에 가야 하면 다 같이 운명 공동체가 되어 이동했다.
환승지인 암스테르담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였다. 그러나 여기서 아이들을 잃어버리면 완전히 국제미아가 되어버린다는 걱정 때문에 더욱더 아이들과 짐을 필사적으로 챙기면서 열심히 환승 게이트를 찾아갔다. 암스테르담에서 제네바까지 마지막 구간은 두 시간도 채 안 되었으나 세상에서 가장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드디어 제네바에 도착하고 공항에서 아내랑 재회했을 때는 구세주를 만난 느낌이었다. 얼마나 반가웠던지 눈물까지 흘린 것은 아니지만, 꽤 울컥했다.
스위스는 인구 820만 명(2017년 기준)에 면적이 한반도의 5분의 1밖에 안 되는 작은 국가이다. 이렇다 할 지하자원도 없고, 국토의 60%가 알프스산맥으로 덮여 있다. 게다가 독일어(63%), 불어(23%), 이탈리아어(8%), 로만슈어(0.5%). 이렇게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모여서 살고 있고, 이 네 가지 언어가 모두 국가 공용어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스위스는 금융, 제약, 관광산업 등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발전시켰고, 현재 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 중 하나이다(2018년 IMF 집계 1인당 GDP 86,835달러로 세계 2위).
스위스의 수도 베른에는 우리나라 대사관이 있고, 주요 국제기구들이 모여 있는 제네바에는 우리나라 대표부가 있다. 독일어권인 베른과 달리 제네바는 불어권이다.
스위스에서 우리가 살게 된 집은 제네바 시내에서 벗어나 호수를 끼고 북쪽으로 20㎞ 정도 가다 보면 나오는 버쥐보세(Bogis-Bossey)라는 꼬뮌(행정구역상 가장 작은 단위)에 있었다. 참고로 스위스 행정구역은 26개 주 단위인 칸톤(Canton), 159개 구(District), 2,222개 꼬뮌(Commune)으로 나뉜다.
보통 제네바 대표부에 부임하는 우리나라 외교관들은 가족 구성원이 어떻게 되는가에 따라 거주지가 달라진다. 물가가 워낙 비싼 곳이기 때문에 아이들 없이 부임하는 외교관의 경우는 제네바 시내의 조그마한 아파트를 구해서 살지만, 아이들과 함께 가족이 부임하면 집값을 감당할 수 없어서 시내 외곽에 집을 구하는 경우가 많다. 보통 제네바 대표부에 발령받는 외교관들은 특별한 문제가 없으면 대부분 전임자가 사용하던 집을 인계받게 되는데, 이 집도 전임자의 집이었다.
공항에서 아내와 기쁜 재회를 한 후 15분 정도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우리 동네 입구에 들어섰는데, 완전히 전형적인 스위스 시골 풍경이 나타났다. 자주색 지붕과 회색 벽돌로 만들어진 예쁜 집에서 금방이라도 알프스 소녀 하이디가 뛰어나올 것 같았고, 마을 곳곳에 있는 푸른 초원에는 소가 한가히 풀을 뜯어 먹고 있었다. 포도밭에는 농부가 봄을 맞이하여 한창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우리 집은 동네 포도밭 바로 인근에 있었다. 평생 아파트에서만 살아본 애들은 서울 시내에서 벗어나 한가한 시골에 오니까 정말 신기해했다. 집 앞을 지나가는 소 떼, 동네 초등학교 앞 농경지에서 트랙터를 타고 일하는 농부, 비닐 모자를 쓰고 있는 포도밭 나무들, 뜬금없이 말을 타고 지나가는 동네 주민 등등 모두 다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집에 들어가면서 2주 전 먼저 와 있던 아내가 그동안 혼자 스위스 시골에 와서 나머지 식구가 도착하기 전까지 가구와 살림살이를 장만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을까 생각했는데, 웬걸. 집에 들어오니까 휑한 거실에 엎어놓은 빈 상자만 덩그러니 있었다. 이게 뭐지 싶은 마음으로 2층 침실에 올라가니까 바닥에 노숙자용으로 보이는 매트리스가 2개 있었다.
“여보,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았어? 그런데 가구는 아직 구입 못했나 보지”
당혹스러움을 최대한 숨기면서 물어보았다.
“어, 이케아에 가서 필요한 가구를 다 샀는데, 배달 오는 데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네……. 며칠 후면 도착할 거야. 다행히도 전임자가 남기고 간 매트리스가 있으니까 일단 거기서 자면 될 거 같다.”
2주 전에 주문한 가구가 아직 배달되지 않은 것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이는 내 생활 리듬이 빛과 같은 속도로 모든 것이 처리되는 한국의 속도에 맞추어져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날 이후 스위스에서의 2년은 스위스의 리듬에 내 생활 리듬을 맞추어가는 지난한 과정이었다.
아내는 가구가 늦게 오는 것을 미안해하면서 이를 만회하려는 듯 본인이 직접 인터넷을 설치했다고 자랑했다. 집에 와이파이가 가능하도록 설치해놓다니 역시 우리 아내구나 싶었다. 전부터 우리 집에서는 각종 기계와 관련된 것을 아내가 맡아왔는데, 스위스에서도 아내의 기술력은 통했다.
아내는 이임하는 동료 외교관으로부터 자동차도 구입해 놓았다. 주방에는 붙박이 냉장고와 가스레인지가 있었다. 그리고 대표부에서 새로 부임하는 외교관들을 위해 한 달 서바이벌 키트(밥솥, 쌀, 수저, 젓가락, 그릇 등)를 제공하기 때문에 당장 며칠간 밥해 먹을 수는 있었다. 이 정도면 아내가 스위스에 선발대로 와서 미리 정착하는 미션을 웬만큼 완수한 것으로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