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3. 피레네 너머 스페인

by 비아루나 Via Luna

피레네 산맥의 새벽, 희미한 어둠 속에 연녹빛 산들이 서서히 얼굴을 드러낸다. 귀뚜라미 소리만 가득하던 세상에 빛과 함께 인간의 소리가 섞여든다. 거대한 자연은 품이 넓다. 일출을 바라보며 조용히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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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길이 끝날 무렵, 더 단단하고 부드러운 사람이 되길


사람들이 하나 둘 식당으로 들어온다. 아침은 바게트, 커피, 오믈렛으로 단출했다. 론세스바예스까지는 카페도 가게도 없다기에 남김없이 먹었다. 텐트 안에서 짐들을 정리하다 결국 샤워타월과 물티슈는 배낭에서 뺐다. 다른 순례객은 청바지와 책을 두고 길을 나선다. 배낭을 메고 걸은 지 하루 만에 내가 지고 갈 수 있는 짐의 무게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꼭 필요한 것과 있으면 좋은 것을 나눠본다. 일상에서 ‘있으면 좋은 것’들은 이 길 위에선 그저 짐일 뿐이다.


아직 아침 9시도 안 되었는데 벌써 생장에서 출발한 순례객들이 하나 둘 오리손 산장 앞을 지나간다. 나도 서둘러 배낭을 메고 나섰다. 길은 완만하게 펼쳐진다. 연녹빛 산맥의 끝과 파란 하늘, 하얀 구름, 햇살과 바람까지. 걷기에 딱 맞는 날씨였다. 구부러진 길의 코너를 도는데 아래에 풀색 담요가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담요가 꿈틀거렸다.


한 쌍의 순례자 커플이 서로를 안고 잠들어 있었다. 지난밤 노숙을 했나 보다. 이 시간까지 자고 있는 걸 보니, 간밤이 쉽지 않았던 듯하다. 전날 밤, 나 역시 텐트 안에서 있는 옷을 몽땅 껴입고 잤다. 8월이지만 피레네 산중의 밤은 꽤 쌀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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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만에 배낭을 메고 걷는 감각이 조금은 익숙해졌다. 스틱 커버를 챙기지 않아 아스팔트에 스틱이 닿을 때마다 딱딱 소리가 난다. 아침 피레네의 고요함을 깨고 싶지 않아서 가능하면 풀밭으로 걷는다. 이 길에서는 다른 사람보다 뒤처지는 것을 걱정하지 않기로 한다. 내 몸의 신호에 귀 기울이고, 길에서 만나는 작고 아름다운 것들을 놓치지 않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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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베레모를 쓴 쌍둥이처럼 보이는 할아버지 두 명이 나를 지나쳐 앞서간다. 프랑스 커플인 육십 대 부부는 뒷모습이 무척 씩씩해 보였는데 너무 빨리 걸어서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숲길을 돌고 또 돌고 단조로운 길들이 계속된다.


나무와 꽃들을 하나씩 보며 걷자 눈앞에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내가 아는 식물의 이름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언덕 오르막길이 끝에 다다르자 펼쳐진 풍경에 말을 잃었다. 카미노 여행기에서 본 사진을 여기서 찍었나 싶을 정도로 하늘과 산, 나무와 땅, 구름이 한 데 섞여 있었다. 마치 구름 위에 떠서 세상을 보는 듯했다. 배낭을 내려놓고 정상에서 한동안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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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가는 길은 두 군데로 나 있다. 한쪽에는 가파르지만 빠른 길, 반대편에는 조금 완만하지만 돌아가야 하는 길이 있었다. 사람들은 거의 가파른 길로 내려간다. 인적이 뜸한 길을 걷는 것이 위험할까 봐 나도 가파른 길을 택했다.

불과 오 분도 걷지 않았는데, 후회가 밀려왔다. 경사가 너무 가팔라 10킬로그램짜리 배낭의 무게가 모두 발끝으로 쏠리는 느낌이었다. 앞으로 꼬꾸라지지 않기 위해 저절로 앞꿈치에 힘이 들어간다. 배낭이 거대한 바위처럼 느껴진다.


내리막길이 끝날 무렵 저 멀리 숲 속에 성처럼 생긴 건물 지붕이 보였다. 12세기에 지어진 수도원, 지금은 알베르게로 사용되는 알베르게 데 페레그리노스 데 론세스바예스다.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에 도착한 것이다. 론세스바예즈는 스페인 북부 나바라 지방에 위치한 작은 마을로 프랑스와 스페인을 연결하는 중요한 경유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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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게 앞에는 잔디밭에 누워 쉬는 사람들, 레스토랑 앞 야외 테이블에 앉아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론세스바예즈에서 순례길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은 탓에 순례 스탬프를 받는데 한참이 걸렸다. 스탬프를 받고 밖에 나와 보니 세바스찬이 저만치 서 있다. 신발 때문에 발이 아파서 샌들로 갈아 신고 걸었다고 한다. 론세스바에즈 알베르가에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조금 더 걸어서 작은 마을에 머물 예정이라고 한다. 피레네에서 옆 텐트에 묶었던 지수 언니도 알베르게 앞 잔디에서 쉬고 있었다. 론세스바예즈의 알베르게는 커다란 홀 안에 수십 개의 2층 침대가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다. 사람들의 체온과 짐들로 공간이 묵직했다. 나는 배정된 침대 아래층에 배낭과 짐을 풀고 한숨 돌린 후 주변 구경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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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게 옆에는 17세기에 지어진 건물을 현대적으로 개조한 호텔이 있었는데 하얀 회벽에 한 면이 돌벽으로 되어 있다. 오래된 건물의 고풍스러움에 매료되어 정신없이 구경을 하는데 아침에 본 스페인 아저씨 부부가 반갑게 인사를 한다. 저녁을 먹을 수 있는 레스토랑이 있다며 알려준 덕분에 다행히 8시 타임 저녁 식사를 예약을 할 수 있었다.


저녁 식사 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어서 성당에 미사를 보러 갔다. 성당은 순례객들로 자리가 거의 차 있었다. 스페인어로 진행되는 미사를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하느님께 기도를 드렸다. 미사를 마치고 8시가 가까워졌다.


지수 언니와 내가 앉은 테이블에 포르투갈 아줌마가 동석했다. 잠시 후에 젊은 남자 한 명이 인사를 하며 마지막 남은 자리에 앉는다. 우리는 간단히 통성명을 했다. 포르투갈 출신의 이자벨은 독일에 살고 있고, 이번 여정이 끝나면 고향 포르투갈에 들를 예정이라고 했다.


스페인 남자 다니엘은 아이슬란드에서 하이킹을 마친 뒤, 남은 열흘 휴가 동안 카미노를 걸을 계획이라고 했다. 시간이 충분하지 않아서 이번에는 부르고스까지만 갈 예정이라고 했다. 같은 테이블에 한국에서 온 여자가 두 명이나 있는 게 신기한 듯 한국에서도 카미노를 아느냐고 물었다. 저녁 식사는 순례자 메뉴인데 아침 식사 후 처음 먹는 제대로 된 식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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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식사를 마치고 알베르게로 돌아오자 곧 소등 시간이다. 열 시 정각에 소등이 되자마자 내 침대 옆과 2층 침대 위 칸에서 코 고는 소리가 요란하다. 귀마개를 겨우 찾아서 잠을 청했는데 왼쪽 어깨에 따끔 한 무엇인가가 느껴졌다. 잠결에도 침대벼룩 걱정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호주 여행에서 침대벼룩에 대한 끔찍한 기억을 갖고 있는 나는 잠이 들지 않았다.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고 화장실로 가서 거울에 어깨를 비쳐보았다. 벌레 물린 자국 두 개가 나란히 생겼다. 약을 바르고 억지로 눈을 감았지만, 밤새 이어진 코 고는 소리 속에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스페인에서의 첫날밤은 그렇게 뒤척이며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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