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5. 샌드위치 하나가 얼마의 가치일까

팜플로나로 가는 길

by 비아루나 Via Luna

밤새 뒤척거리다 새벽에 일어나 길을 나섰다. 간간히 앞에 보이는 순례자들을 따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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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굶어서인지 허기가 밀려왔다. 지금 내 배낭에 먹을 것이 하나도 없다. 이로츠라는 마을에 서 아침을 해결하려 했지만, 마을이 너무 작아서 카페 하나 없다. 이런 허기를 느껴보는 것이 도대체 얼마 만일까. 서울에서는 음식이란 것은 돈만 있으면 항상 살 수 있는 것이었는데, 지금 이 순간엔 로또에 당첨돼도 샌드위치 한 조각 살 수 있는 곳이 없다.


마을 골목길을 지나자 도로가 나왔다. 배에서는 연신 꾸르륵 소리가 나는데 옆에는 순례객도 없다. 도로 옆에 있는 집 창문 너머 바게트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혹시 근처에 카페라도 있을까 그 집 앞에서 서성일 때, 반대편에서 집주인으로 보이는 할머니가 다가왔다.


“혹시 이 근처에 카페나 빵을 파는 곳이 있나요?”

할머니는 빙그레 웃더니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을 하신다. 내가 배낭을 가리키며 괜찮다고 하자, 그녀는 바게트를 선뜻 건네주었다. 돈을 드리려 했지만 끝내 받지 않으셨다.


할머니와 작별 인사를 하고 도로를 한참 걸은 후에야 조그만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은 아직 조용하고 거리에는 사람이라곤 거의 보이지 않는다. 조금 더 가다 보니 멀리 바 표지판이 보인다. 쉴 곳이 부족한 순례길에서는 바( Bar)라고 쓰인 간판만 보여도 다리에 힘이 솟았다. 표지판을 따라가 보니 집 앞 조그만 책상 위에 커피, 빵, 과일들이 놓여 있었다. 옆 테이블에 여자 한 명이 커피를 마시고 있다. 집주인 아들처럼 보이는 십 대 소년에게서 나는 커피와 바나나를 샀다. 순례자를 위한 임시 카페였다. 카페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마을에서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것만 해도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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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채우고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도로를 지나 경사가 가파른 오르막 길이 나왔다. 햇빛은 점점 강해진다. 숲길은 한 사람이 겨우 걸을 수 있을 정도로 좁았다. 길에는 들꽃이 흐드러지고 산열매가 가득했다. 군데군데 자갈길이 이어졌는데 평평하지 않은 길을 걸을 때 내 신경은 온통 발에 쏠렸다.


앞에 걷는 남자가 한참 무언가를 따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라즈베리였다. 탐스럽게 익은 열매들도 꽤 보였다. 앞서 가던 순례객들과 나도 잠시 멈춰 라즈베리를 땄다. 순례길에서 맛보는 라즈베리는 마트에서 사 먹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달콤했다.


숲길이 끝날 무렵, 좁은 오르막 길을 지나니 빌바나라는 마을이 나타났다. 빌바나는 오늘 지나친 마을 중 가장 크고 레스토랑과 바도 있었다. 스페인의 바는 우리나라의 카페와 비슷한데 술과 커피와 간단한 음식들을 판다. 세련되지는 않지만 스페인의 바에는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긴다. 웨이터는 자주 눈 맞춤을 하고 안부를 묻고 바의 손님들도 반갑게 인사를 한다. 아마 대부분이 순례자여서 더 쉽게 인사를 건네는 것도 같다. 바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발 상태를 살핀 후, 다시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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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길을 지나 도착한 팜플라나는 초입부터 역사와 문화가 느껴졌다. 고대 로마 시대부터 있었다는 이 도시는 중세 시대에는 나바라 왕국의 수도였다. 도시 곳곳에 성당과 오래된 건물들이 즐비했다. 매해 7월이면 이곳은 산페르민 소몰이 축제로 시끌벅적하다. 헤밍웨이의 책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에도 이 축제가 등장하는데 그 역시 이 도시에 한때 머물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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팜플로나에서 여정을 시작하는 순례객들도 많아서 이미 알베르게에는 빈 침대가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호스텔 주소를 받아 들고 한참을 헤맨 끝에 허름한 건물 앞에 도착했다. 숙소는 꽤 남루했지만 2인실을 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운이 좋으면 오늘 밤은 코 고는 소리 때문에 잠을 설치지는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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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을 풀고 샤워와 빨래를 마친 후에 도시 구경에 나섰다. 시에스타 시간이라 대부분의 가게나 건물들이 닫혀 있었다. 운이 좋게 문 열린 교회에 딸린 박물관을 발견했다. 박물관 안에는 오래된 무명 예술가들의 작품들이 많았다. 나의 눈길을 끈 것은 마리아와 아기 예수 조각상들이었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처럼 유명 조각상에서 볼 수 있는 우아한 마리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차라리 민화에 나올 듯 투박한 농부의 어머니에 가까웠다. 마리아와 예수상은 조각상마다 얼굴이나 비율이 제각각이었다. 이 조각상들을 만든 사람들이 문득 궁금해졌다. 조각상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어머니, 할머니 생각이 난다. 조각상들은 생김새는 제각각이었지만, 그 안에는 하나같이 사랑과 구원을 향한 갈망이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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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는 옆 방에 머무는 독일에서 온 알리아스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녀는 교회 재단에서 운영하는 병원에서 근무하는 내과 의사였다. 의사라면 모두 다 부러워하는 직업인데 그녀는 무척 지쳐 보였다.


“환자에게 암 선고를 내릴 때마다 내 마음도 조금씩 무너지는 것 같아”


의사는 병을 고치는 직업이니 보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녀 또한 내가 모르는 어려움이 있었다. 세상의 모든 일들은 밝음과 그늘이 공존하는 것 같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 하기 싫은 일 또한 감당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우리는 종종 어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산다. 목적지에 다다르면 삶이 명확해질 줄 알았지만, 도착한 그곳에는 또 다른 질문이 기다리고 있다. 어쩌면 목적지라는 건 애초에 없었던, 우리가 만들어낸 하나의 환상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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