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8. 행운과 불운

에스테야에서 로그로뇨

by 비아루나 Via Luna

어젯밤도 코 고는 소리에 잠을 설쳤다. 새벽 한 시가 넘도록 잠들지 못한 나는 당장이라도 짐을 싸서 나가고 싶은 충동이 목구멍까지 치밀었다. 알베르게에서 자는 것은 생각보다 녹록지 않다. 나처럼 소리에 민감한 사람은 푹 자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결국 어둠 속에서 귀마개를 찾아 귀에 꽂은 후 겨우 잠이 들었다. 세 시간 남짓 잠을 자고 다섯 시 반에 깨어나 짐을 챙긴 후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1층에는 아침 식사를 하는 사람들로 만원이었다. 커피를 마시고 사과 한 개로 아침 식사를 대신하고 알베르게 문을 나섰다. 대문 앞에는 젊은 남자가 길 떠날 차비를 하고 있었다. 파블로는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마드리드에 산 지 10년째라고 했다. 호텔에 근무하는데 3년째 파트매니저에서 승진을 못하고 있어서 호주나 독일로 이주할까 고민중이었다. 우리는 걷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화살표를 찾지 못해 헤매기 시작했다. 별빛과 헤드랜턴의 희미한 불빛 밖에 없었다. 칠흙 같은 어둠 속에서 산 길로 향하는 길이 희미하게 보였다. 어디로 갈지 몰라 망설이는데 멀리 할아버지 한 분이 지나가고 있었다. 파블로가 급하게 할아버지에게 달려가 길을 물었다.



어둠 속에서 한참을 걷는데 뒤쪽에 한 무리의 순례객들이 가까워지는 소리가 들렸다. 파블로가 순롁객들에게 다가가 이야기를 하더니 나에게 소개할 사람이 있다고 했다. 나보다 키가 한 뼘쯤 커 보였고 걸음걸이에 씩씩한 에너지가 가득한 한국 여성이 순례객 무리에서 나와 인사를 했다. 모두들 그녀를 킴이라고 불렀다. 킴은 낯을 가리는 나와는 달리 시원시원하고 외향적인 성격이었다.



어둠 속에서 일행들이 멀리 보이는 수도원 쪽으로 걸었다. 순례길에서 유명한 이라체 수도원이었다. 수도원에서 와인을 무료로 마실 수 있다고 했다. 옛날에 순례자들이 에스테야에 도착할 때쯤 탈진하는 경우가 많아서, 수도원에서 빚은 와인을 무료로 제공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언제부터인가 이라체 수도원의 와인이 하느님의 축복을 받았다는 소문이 돌아서 일부러 이 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생겼다. 순례객들에게 와인을 나눠주는 전통은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사람들은 와인을 시음하는 수도꼭지 앞에서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다.



나는 순례객들을 뒤로 하고 언덕길을 올랐다. 먼저 도착한 파블로가 벤치에 앉아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이 마을에는 순례자용 지팡이를 만드는 할아버지가 있는데 파블로는 그 할아버지의 지팡이를 갖어 기다리는 중이라고 했다. 잠시 후, 멜빵 바지를 입고 단정한 모자를 쓴 할아버지가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바로 그 지팡이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는 내 배낭을 보시고 뭔가 잘못 되었다는 표정을 짓더니 배낭 어깨끈을 바짝 조여 주셨다.


세상에, 배낭끈 고쳐 맨 것이 이렇게 큰 차이라니


배낭은 어깨로 메면 안되고 어깨는 끈이 걸쳐진 느낌이라고 했던 말이 이 말이구나 싶었다. 배낭이 훨씬 가벼워진 느낌이다. 나는 등산스틱이 있어서 할아버지와 파블로와 작별 인사를 하고 먼저 길을 나섰다.



밀밭과 포도밭이 이어지는데 마치 한 폭의 동양화 같았다. 밀밭의 황금빛, 포도밭의 연두빛,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 네 가지 색들이 만들어내는 조합은 단순하지만 아름다웠다.



오늘도 어김없이 스페인의 태양이 쏟아진다. 한국과는 햇살의 결이 다르다. 왼발에 계속 불편한 느낌이 들어서 살펴보니 왼쪽 새끼 발가락에 물집이 생겼다. 나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밀밭길이 계속 되었다. 한참을 걷다 밀밭 길 중간에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발이 너무 아파서 잠시 그늘에 쉬어 가기로 했다. 황금빛 밀밭 사이 외따로 서 있는 나무 그늘, 그 아래에 앉아 세상을 본다. 햇빛과 바람, 인사 한마디, 세상은 단순하고 부드러워 보였다. 그늘에서 한숨 돌리고 나는 기운을 차려 다시 걷기 시작했다.


반복되는 풍경 속에 대해 나의 행운과 불운에 대해 생각했다. 인생에는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냥 주어지는 것들이 있다. 어찌할 수 없는 것들. 하지만 과거의 기억에 갇혀 스스로를 불운의 감옥에 가둘 지는 나의 선택이다. 가끔 힘들고 버거우면 이렇게 쉬어가면 되는 것이 아닐까? 길을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언젠가는 목적지에 다다를 것이다.



로스 아르코스에 도착해보니 레스토랑 야외 테이블에 사람들이 빼곡했다. 나는 카페에 들르는 대신 도시의 번잡함을 뒤로 하고 더 걷기로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허허벌판에 끝없이 펼쳐지는 자갈길이 시작되었다. 정말 아무 것도 없었다. 말 그대로 ‘아웃 오브 노웨어’라는 말이 딱 어울릴 듯한 곳이었다. 이미 시계는 오후 2시를 가리키고 땡볕 더위에 걷는 사람은 나 혼자 뿐이었다. 가끔씩 자전거를 탄 순례객이 지나갔다.



한낮의 태양은 작열하고 발의 통증도 점점 심해졌다. 풍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여전히 그늘 하나 없고 물도 없고 내게는 걷는 길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발목 통증이 심해지고 있다. 내려가는 길은 경사가 가파른데 아무도 없고 나 혼자 걷고 있다. 새로 시작된 마을 입구에 마리아 알베르게가 보였다. 나는 더 돌아볼 힘도 없어서 알베르게에서 침대를 배정받고 2층으로 올라갔다. 샤워와 빨래를 끝내고 타이레놀을 먹고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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