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are the sunshine of my life - 스티브원더
걷기 시작한 지 열흘, 나는 서울에서와는 다른 고민을 한다. 이 고민도 언젠가는 끝나겠지. 중요한 건, 지금을 살아내는 일이다. 사랑이든, 슬픔이든, 행복이든 - 지금 이 자리에서 나의 몫을 충분히 느끼고 경험할 때 비로소 우리는 삶을 온전하게 살아가는 것 아닐까?
다니엘, 라울, 하비에르, 마르타, 나, 다섯이 길을 나섰다. 세상은 아직 어둠 속에 잠들어 있다. 중세의 역사가 어린 산토도밍고를 뒤로 하고 흙길에 접어들었다. 어느덧 다니엘과 나만 둘이 걷게 되었다. 어스름이 깔린 초원에 솜뭉치처럼 희끄무레한 것들이 보인다.
개 짖는 소리만 가끔 정적을 깨뜨린다. 가까이 가보니 수백 마리의 양 떼가 잠들어 있다. 우리는 양들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옆을 지나 걸었다. 어둠이 서서히 걷히자 추수를 끝낸 밀밭이 광활하게 펼쳐졌다. 그 사이로 듬성듬성 나무들이 서 있다. 아스팔트 위엔 다니엘과 나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진다.
그라뇽에 도착하자 작은 가게 앞 테이블에 자리 잡고 간단히 아침 식사를 했다.
나는 화장실을 찾다 우연히 오래된 순례자 병원을 발견했다. 거친 돌담에서 수백 년의 세월이 느껴졌다. 노크를 하니 청소부 아줌마가 문을 열어 주었고, 나는 양해를 구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2층으로 올라가자 베란다 벽에는 ‘신발을 벗으시오’ 안내문이 6개국으로 쓰여 있었다. 그중에 한국어도 있었다.
순례자 병원 내부는 마치 수 세기 전 수도원을 옮겨 놓은 듯했다. 천장과 벽, 바닥까지 돌로 된 내부. 한쪽 벽에는 순례자들을 위한 비상약이 수납장에 정리되어 있었다. 문득 이 길이 오랜 세월 유지되어 온 비밀을 알 것 같았다. 보이지 않는 손이 오랫동안 이 길을 걷는 사람들을 돌보고 있었던 것이다. 물도 먹을 것도 부족한 날, 인적 없는 길에서 문을 연 가게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위안이 된다.
진한 카페 콘 레체를 마신 후, 다니엘과 나는 그라뇬을 뒤로하고 걷기 시작했다. 자갈길은 곧 아스팔트로 이어지고, 세상은 밀밭과 포도밭, 드문드문 보이는 해바라기 밭이 전부인 것처럼 보였다. 오늘도 만만치 않게 더운 하루가 될 것 같다. 우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다가 어느새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다니엘은 퇴근 후에 음악을 믹싱 하는 것이 취미라고 했다.
불쑥 이어폰을 꺼내 나에게 건넨다. “한 곡만 들어봐” 괜찮다고 고개를 저었지만, 그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했다. “딱 한 곡만”
트랙 16
You are Sunshine of my Life - 스티비원더
스티비원더가 딸에게 주려고 만든 노래, 나도 오래전부터 좋아하던 곡이다. 그는 저만치 앞서 가고 나는 밀밭길과 포도밭길 사이의 흙길을 천천히 걸었다. 하늘은 청명했고 하얀 구름조차 수채화의 일부처럼 보였다. 순수한 기쁨이 이유 없이 밀려온다. 너무 행복해서, 문득 두려워진다.
다니엘은 하비에르와 앞서 걸어가다 가끔씩 뒤돌아 나를 바라본다. 나는 그 노래를 몇 번이고 반복해 들었다. 지금은 어떤 복잡한 생각도 하고 싶지 않다. 삶을 살다 보면, 다시 돌아가고 싶은 완벽한 순간이 있다는 걸 안다. 그리고 지금이 아마도 그 순간이라는 것도.
하비에르와 라울이 앞서 걷고 나는 다시 다니엘과 나란히 걷게 되었다. 그가 음악이 마음에 들었냐고 묻는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자신의 재즈 믹싱 이야기를 꺼내며 말했다.
“이게 내 트랙 18번이야”
우리는 이어폰을 하나씩 나누어 끼었다.
그의 재즈 트랙은 꽤 길었다. 앞에는 가없는 밀밭과 푸른 하늘이 있고, 우리는 말없이 음악을 들으며 걸었다. 영원히 정지하고 싶은 순수하고 평화로운 순간이었다.
목적지를 8킬로 정도 앞두고, 라울과 함께 걷게 되었다. 그는 유머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다. 발목이 아픈 나를 배려해 언제나 한 발 뒤에서 걸어주곤 했다. 라울은 국경 없는 의사회 소속으로 3년 동안 아프리카에서 일했다. 새 프로젝트를 앞두고 할아버지의 위독 소식을 듣고 귀국했지만, 열흘을 넘기지 못하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는 생각을 정리하고 싶어서 카미노를 걷는 중이었다.
유쾌하지만 내면이 단단한 사람, 타인의 시선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방향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어느 날, 내가 실수로 그를 ‘페르난도’라고 부르자, 모두들 한바탕 웃고 난리가 났다.
다니엘이 나에게
“너 방금 정말 페르난도라고 한 거야?”
“응, 방금 이탈리아 남자들도 라울을 페르난도라고 부르던데, 뭐가 잘못된 거야?”
“라울은 신경 쓰지 않아, 사람들이 그를 뭐라고 부르든 간에, 아마 개똥이라고 불러도 웃고 말걸” 다니엘의 대답에 더 큰 웃음이 터졌다.
정작 라울은 특유의 편안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는 카미노를 다 걸으면 바르셀로나에 있는 공공의학 정책 관련 기관에서 일할 예정이라고 했다.
왼쪽 발목 때문에 속도가 느려지는 나를 위해 그는 걸음을 늦추며 말한다
“제이미, 잘하고 있어!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오늘 목적지야.”
자신만의 길을 묵묵히 개척해 나가는 라울이 왠지 모르게 부러웠다.
오후 두 시가 지나자 태양은 더 강렬해진다. 저 멀리 마을이 보이고 하비에르, 다니엘, 마르타가 손을 흔든다. 우리는 성당 벽에 붙은 알베르게 앞 의자에 앉아 목을 축였다. 나는 체크인 후 짐을 풀고 샤워를 했다. 카미노에서 제일 행복한 시간 중 하나는 하루의 걷기를 마치고 맞는 이 샤워 시간이다. 수돗가에서 빨래를 하는데 다니엘이 다가왔다.
“제이미, 비누 있으면 좀 빌려줄래?”
“비누는 알베르게에 두고 왔어. 샴푸로 빨래를 하는데 이거라도 괜찮으면 나눠줄게”
우리는 나란히 서서 빨래를 한다. 청소든 빨래든 무언이든 닦고 쓸고 정갈하게 하는 일은, 이외로 좋은 에너지를 준다. 둥둥 떠다니던 마음이 차분해지는 듯했다.
빨래를 마치고 하비에르와 라울이 기다리는 식당으로 향했다. 점심 테이블 위에는 순대처럼 생긴 음식도 있었다. 스페인어로 ‘모르시야’라는 이 소시지는 맛도 순대와 꽤 비슷했다.
점심 식사를 마친 뒤 다니엘과 동네 구경을 하러 나섰다. 성당을 지나 걷는데 그가 물었다.
“제이미, 카미노 다 걷고 나면 바르셀로나에 잠깐 들르지 않을래?”
나는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친구네 가기로 했어.
이미 비행기표도 샀고”
다니엘은 살짝 낙담한 듯한 표정이었다. 그는 내 뒤를 걸으며 자꾸 내 이름을 불렀다. 돌아보면, 아무 말없이 웃고 있다.
동네 산책을 마치고 잠자리에 들 시간이 가까워졌다. 알베르게 그의 방 앞에서 “굿 나잇”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데, 그가 가볍게 나를 붙잡더니 볼에 굿 나잇 키스를 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지만 기분이 묘했다. 예전에 프랑스에서 지낸 적이 있어 남유럽 사람들의 볼키스가 낯설지 않은데도 왠지 무언가 들킨 사람처럼 두근거렸다. 침대에 누웠지만, 자꾸 다니엘이 한 말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