옅은 파란 하늘 아래, 황금빛 밀밭이 끝없이 펼쳐진다.
다니엘이 나와 나란히 걷는다.
“어릴 적엔 꿈이 뭐였어?"
“조종사가 되고 싶었어. 그런데 법대에 갔지.”
“왜?”
“원래는 프로그래머가 되려 했는데, 하루 종일 컴퓨터를 보고 살아야 한다고 해서 포기했어.
마침내 친구 중에 법대에 가는 친구가 있어서, 그냥… 따라간 거지. 좀 웃기지?”
“하하, 나도 전공은 깊이 고민하지는 않았어.
중학교 때는 천문학자가 되고 싶었는데, 천문학자는 별을 숫자로만 생각하게 된다고 하더라고.
그 말을 듣고 포기.
정신과 의사도 생각했지만, 의대 가면 전공 상관없이 피를 보고 해부도 해야 한다고 해서 흥미를 잃었어.”
“정신과 의사, 왠지 너랑 잘 어울렸을 것 같은데.”
“고등학생 때는 작가로 생계유지가 힘드니, 외교관이 되어서 밤에는 글을 쓰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교생 선생님이 러시아어과가 유망하다고 해서 노문과를 선택했지.
물론 도스토옙스키나 톨스토이의 작품을 공부하고 싶기도 했고.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이 가끔은 참 싱겁게 내려져.
넌 영화학교는 왜 간 거야?”
“법대 나와서 로펌에서 일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나?’ 싶은 거야.
원래 꿈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영화가 떠올랐어.
회사 다니면서 단편 영화를 두 편 찍고, 결국 쿠바에 있는 영화 학교에 갔지.”
“와, 정말 대단하다. 그런데 왜 다시 변호사로?”
“영화감독이 될 재능은 부족한 것 같았어. 취직 걱정도 있었고.”
다니엘은 지금 하는 로펌 일이 자신과 잘 맞지 않는다고 했다.
일은 많고, 상사와 맞서야 하는 순간이 몹시 힘들다고 했다.
"다른 회사로 옮길 생각은 없어?”
“형법 전공이라 선택지가 별로 없어.”
“국제기구나, 대학에서 가르치는 일은 어때?”
“그게 더 잘 맞을 것 같긴 해.
그런데 친구들은 벌써 박사 학위를 마쳤거든.
내가 이제 시작하면 지난 시간이 아깝게 느껴져.”
“삶이 꼭 ‘무엇’이 되어야만 완성되는 건 아닌 것 같아.
네가 원한 길이 아니었더라도 그 시간이 결코 낭비된 건 아닐 거야.
진심으로 원하는 일을 한 번이라도 도전해 보는 건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 같아.”
다니엘과 이야기를 하며, 내가 하는 말이 사실 나 자신에게 하는 말 같았다.
번듯한 빌딩에서 일하며 글로벌 기업의 경영진과 회의하는 생활.
그 이면에는 ‘이 일이 정말 내 인생을 걸 만한가’라는 질문이 늘 있었다.
밀밭이 끝나고 숲이 시작된다.
친한 친구에게도 잘하지 않는 이야기를, 불과 만난 지 며칠밖에 안 된 사람과 나누며 순례길의 마법을 느낀다.
며칠간 뙤약볕 아래 걸은 터라 약간의 오르막이었지만 숲길이 반가웠다.
그런데 다음 목적지인 아타푸에르카 도착 전까지 물이나 음식을 살 곳이 한 군데도 없다.
남은 건 반쯤 마신 생수 한 병과 사과 한 조각뿐.
숲 옆 길에 수도가 보여 달려갔지만 음용 불가였다.
하루 종일 먹은 게 아침의 크루아상 하나와 커피 한 잔 뿐이라, 우리 둘 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그늘에 앉아 남은 사과 하나를 쪼개 먹고 다시 걷는다.
나는 발목 통증 때문에 스틱을 목발처럼 짚었다.
다니엘이 배낭을 달라 한다.
미안한 마음에 한참 실랑이를 하다, 결국 그가 앞뒤로 배낭 두 개를 메고 걷는다.
발이 한결 가벼워진다.
“제이미, 남자 친구 몇 명이나 있었어?”
“그건 일급비밀.”
“흠, 이제 너 배낭은 네가 들어야겠어.”
우리는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쨍쨍 내리쬐는 스페인 태양 아래를 걸었다.
내일 라울이 부르고스에서 낮 1시 버스를 타야 해서, 오늘은 아타푸에르카까지 가기로 했다.
다니엘이 플레이리스트를 켜자 Sissel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You were always on my mind*
내리막길은 경사가 가파르진 않았지만, 자갈이 많았다.
멀리 고대 인류 그림이 그려진 대형 보드판이 보인다.
이 지역은 호모 에렉투스와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 같은 고대 인류 화석이 발굴된 곳으로 유명하다.
다니엘은 보드판을 가리키며 웃었다.
“정말 우리 조상이 저렇게 생긴 거야?”
시간이 지나면 이런 사소한 순간들이 그리워지겠지.
이 길에서 홀로 걷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우리는 가끔 농담을 주고받다가, 조용히 침묵 속에서 걷는다.
도로 위엔 걷는 사람이 드물고, 산들바람이 불어온다.
날은 여전히 무덥지만 바람 덕에 걷기가 조금 수월해졌다.
마을에 들어선 지 얼마 안 돼, 멀리 라울이 보였다.
알베르게 정원에 있던 그가 다가와 음료수를 건넨다.
오후에 잠깐 낮잠을 잔 뒤, 동네 작은 가게에서 순례길 조가비 모양 목걸이를 샀다.
곧 떠나는 친구들에게 주고 싶었다.
카페에는 검정 뱅헤어를 한 여주인이 있고, 영화 *바그다드 카페*의 *Calling You*가 흐른다.
카페 콘 레체를 주문하고 노트를 꺼냈다.
우리는 길에서 만났고, 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내일을 약속하지 않는다.
다만 운명이 우리에게 친절하다면, 어디선가 한 번 더 스치기를 바랄 뿐이다.
길에서 만났기 때문에 더 쉽게 다가설 수 있지만, 현실에서의 모습은 알 수 없다.
그저 함께 걸은 여정 자체로 충분히 좋았다.
우리 모두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우리가 꿈꾸는 삶과 되고자 하는 사람의 모습에 한 걸음씩, 시간과 노력과 정성을 다해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바에서 나와 알베르게로 가는데, 낯익은 세 명의 모습이 보인다.
내일 라울이 떠나기에 오늘은 다른 순례객들과 근처 식당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함께 걸을 날이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는 게 기분이 묘했다.
저녁을 마치고 알베르게에 도착하니 10시가 넘어 문이 잠겨 있었다.
라울이 창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간 뒤, 문을 열어준다.
나는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왜 이렇게 마음이 복잡해졌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