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14. 부르고스에서의 이별

by 비아루나 Via Luna

오전 6시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알베르게를 나섰다. 오후에 라울이 부르고스에서 바르셀로나행 버스를 타기로 되어 있었다. 동네를 벗어나자 산길이 이어졌다. 안개에 묻혀 카미노 표식이 잘 보이지 않았다. 헤드랜턴을 켜고 걷는데 날은 춥고 왼쪽 발목이 다시 시큰거렸다. 길가에는 돌로 만든 조개 모양의 거대한 그림이 바닥에 그려져 있다.

아홉 시쯤 첫 마을에 도착해 카페오레로 꽁꽁 언 손을 녹였다. 다니엘의 시선이 아무 말 없이 내 얼굴을 오래 붙들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어색한 기분에 눈길을 피하며 커피잔만 만지작거렸다.


첫 마을을 지나 부르고스로 가는 길에서 어쩌다 보니 다니엘과 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사랑에 대한 나의 관점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에리히 프롬의 책 [사랑의 기술]이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를 제대로 알려고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프롬의 이야기에 나의 낭만적인 관념이 송두리째 흔들렸다. 우리는 종종 처음의 떨림을 사랑이라 착각하지만 끌림 후에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갈등과 오해를 동반하는 시간이 온다. 어쩌면 진짜 사랑이란 그 시간을 견디어야만 가능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일찍 출발한 덕에 정오가 되기 전에 부르고스에 도착했다. 라울과 하비에르는 바에서 맥주를 한 잔 하고 있었다. 라울은 네덜란드에 친구 결혼식에 다녀온 후 부르고스부터 다시 걸을 계획이라고 했다.


내가 순례길 초반 쥐비리에서 발목 통증 때문에 널브러져 있을 때 괜찮냐고 물어본 사람이 라울이었다. 다시 그를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 라울과 우리는 짧게 포옹을 나누고 헤어졌다. 그가 버스에 오르는 것을 보고 우리는 버스 정류장을 빠져나왔다.

다니엘과 하비에르가 내일 바르셀로나로 떠날 것이고 나는 하루 더 부르고스에 있을 예정이라 오늘은 알베르게 대신 호텔에서 묶기로 했다.

호텔로 가는 길에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나헤라 이후 버스를 타며 잠시 헤어졌던 시몬이었다. 내일부터 다시 혼자 걷는 순례길에 든든한 친구가 생긴 것 같았다.


부르고스의 호텔은 정갈했고, 순례길을 걷기 시작한 후 처음으로 제대로 된 매트리스에서 자게 되었다. 푹신한 매트리스, 뽀송한 수건, 평소에 당연했던 것들이 순례길에서는 소소한 기쁨이 된다. 샤워를 마치고 호텔 로비에 앉아서 쉬는데 마이클 부블레의 노래가 나온다.


Save the last dance for me


다니엘이 갑자기 소파에서 일어나더니 음악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한다. 차차차를 추는 모습에 아비정전의 장국영처럼 세상 걱정 없는 얼굴이었다. 하비에르는 옆에서 웃느라 숨이 넘어간다. 다니엘은 나에게 같이 추자고 손짓을 한다. 원래 나는 춤을 추는 것을 좋아하지만 오늘은 그냥 그를 보고 있는 것이 좋았다.

부르고스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도시는 주황색 테라코타 지붕들과 쏟아지는 지중해의 건조한 햇살로 반짝거렸다. 다니엘은 자꾸 내 사진을 찍는다. 내가 그만 찍으라고 손사래를 치자 딱 한 번만 찍겠다고 한다. 사진을 보며 “제이미, 이게 네 모습 같아”라며 나에게 카메라를 내민다. 사진 속의 나는 내가 모르던 환한 얼굴이었다. 난 부르고스의 하늘을 배경으로 다니엘과 하비에르의 사진을 찍으며 농담을 했다.


“너네 정말 사귀는 것 같아, 엄청 잘 어울리는데”


나는 아이처럼 깔깔 웃으며 전망대를 먼저 내려갔다. 언젠가 나이가 들어 이 시간을 돌아보면 어떨까. 우리가 만난 것은 불과 며칠 전인데 아주 오래전부터 알았던 사람 같다. 라다크의 오래된 영혼이 이런 것을 두고 이야기하는 걸까?


우리는 부르고스 대성당 구경을 마친 후 다니엘 어머니가 꼭 가보라고 권한 성당을 찾아갔다. 오후 다섯 시에 미사가 있어서 관광객들은 들어갈 수가 없었다. 성당을 한 바퀴 둘러본 뒤 미사를 보기 위해 자리를 잡았다. 스페인 성당에 미사를 보는 사람들은 나이가 지긋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대부분이다. 스페인어를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성당을 가득 채운 엄숙하고 정갈한 분위기에 마음이 차분해졌다.


나는 내일부터 혼자 걸을 길에 대해 생각하며 기도를 했다. 이 길 끝에서 나를 기다리는 건 무엇일까.















keyword
일요일 연재
이전 14화Day 13. 길 위의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