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16. 각각의 색깔들

by 비아루나 Via Luna

우리들 각자에 대한

하느님의 기대는 각각 다릅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흉내는 내지 맙시다

우리의 , , , , 등이 하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서로 연결되어

지탱함으로써 각기 기능을 발휘하는 것처럼

우리 사람 사람은

서로를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 수자 수녀-




다시 혼자 걷는다. 밖은 아직 어둠이 자욱하다. 드문드문 순례객이 보인다. 순례길에서 보았던 프랑스 할머니, 할아버지 팀이 앞서 걷고 있다. 함께 걷지는 않아도 누군가 이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이 위로가 된다. 어두워서 화살표는 잘 안 보이지만 앞의 순례객들을 따라 걷는다.


오래된 건물들과 현대식 건축의 부르고스 호텔을 지나자 다리가 나왔다. 다리 아래 강물 위로 가로등 불빛이 반짝거린다. 마치 시간 여행자가 된 듯하다.



어둠이 걷힐 무렵 시골길을 걷는데 먹구름이 자욱하다. 흙길이 한참 이어지고 주변에는 추수를 끝낸 밀밭들이 온통 황금빛이다. 부르고스 이후부터 말로만 들었던 메세타 평원이 펼쳐진다. 마크 로스코 그림처럼 세상이 두 개의 색으로 나누어진 듯하다. 두 개의 색은 햇살의 변화에 따라 그 안에 다른 색들로 시시각각 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이 세상도 각자가 느끼는 햇살의 강도에 따라 조금 더 따뜻하거나 더 쓸쓸하게 느껴지겠지.

나는 이 형형색색의 세상을 어떻게 느끼고 살아온 걸까? 사방이 밀밭뿐인 평원 위에 순례객을 위한 알베르게가 있었다. 교회를 확장해서 만든 건물인데, 이곳에서 보는 세상은 모든 것이 그림 같다. 바람 소리와 가끔 어디선가 날아온 새소리까지.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본다. 그 소리 안에는 나뭇잎이 바람과 부딪치며 만들어내는 새로운 소리가 있다.


이어폰을 끼고 마이클 부블레의 [Save the last dance for me]를 듣는다. 아마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다니엘이 생각날 것 같다.

SanBol은 마을이라기보다 이 알베르게가 있어서 지어진 이름 같다. 흙길을 계속 걷다 보니 앙증맞은 표지판이 보인다. 표지판 왼쪽으로 한 이백미터쯤 떨어진 곳에 집 한 채와 야외 텐트가 몇 개 보인다. 원래 계획은 오 킬로미터 정도 더 걸어서 온타라스에 도착할 예정이었는데 어제 시몬의 말이 떠올랐다. SanBol에는 전기도 물도 화장실도 없는 알베르게가 있다고 했다.


처음에는 단지 구경하러 들렀는데 밤에 은하수를 볼 수 있다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알베르게에 들어서자 테이블 자리를 권하며 차를 한 잔 내어준다. 내부는 전기가 없어서인지 조금 어두웠다. 도미토리가 있는 방에는 창문이 있어서 밤에 침대에서도 별들이 잘 보일 것 같았다.

점심시간이 되자 여기서 일한다는 쥬디스와 식사를 함께 하게 되었다. 쥬디스는 헝가리 출신인데 순례길을 이미 한 번 걸었고 딸은 헝가리에 있다고 한다. 이 알베르게의 주인은 에드워드라는 스페인 남자인데 쥬디스와는 순례길에서 만났다고 한다. 쥬디스와 점심을 먹는데 밖에서 에드워드가 급하게 쥬디스를 불렀다. 알베르게에 딸린 작은 풀장에서 순례객들 사이에 소동이 일었고 에드워드가 나서서 겨우 진정시켰다. 별것 아닌 해프닝이었지만, 내 마음은 괜히 뒤숭숭해졌다.

SanBol을 떠나 오후 네시부터 다시 걷기 시작했다. 왼쪽 발목 통증과 배낭의 무게가 짓눌렀다. 다니엘이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걸으면서 잡념이 너무 많았다. 생각이 생각을 낳는 나의 고질병이 다시 시작되었다. 만약, 이라는 가정법은 어디로도 나를 데려다주지 못하고 같은 자리를 맴돌게 한다. 우리가 사는 현실에는 가정법이 없고 그 안에서는 직접 부딪쳐 보기까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는 다만 끊임없이 선택하고 주어진 순간을 최대한 생생하게 살아야 하는 것 같다. 그 순간이 모여 인생이 될 테니까.


온타나스에 도착하자 알베르게 앞에 시몬이 보였다. 시몬은 원래 SanBol에 머물 계획이었는데 길에서 술 취한 남자를 만났다고 한다. 그래서 계획을 바꿔 조금 더 큰 마을까지 걸어왔다고 한다. 시몬과 오늘 하루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작은 위안이 되었다. 내일은 또 내일이 해가 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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