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rrion de los Condes
아침 일곱 시가 좀 넘어 출발했다. 공기가 꽤 쌀쌀했다. 나는 짐 챙기는 데 남들보다 두 배는 걸린다. 오늘도 그랬다. 출발하려 보니 시몬과 내가 맨 마지막이었다.
동트는 새벽은 어둠 속에 분홍빛 물감을 풀어놓은 듯했다. 서울의 하늘도 이렇게 예뻤었나? 매일 새벽 두 시에 잠드는 생활을 오래 한 탓에 새벽의 색깔이나 소리를 제대로 느껴 본 기억이 없다. 붉은 노을과 파란 하늘도 빛에 따라 수십 번 색이 바뀐다. 카메라에 담을 수 없는 고요하고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오늘 내가 걷는 이 길과 하늘, 호숫가의 집도 각자의 마음에 따라 다르게 기억되겠지. 어차피 우리가 보는 것은 사물의 본질이 아니라 그 순간 마음의 반영이기도 하니까.
프로미스트 바에 들러 커피를 한 잔 마셨다. 바가 북적여 먼저 떠났는데 오늘따라 길에는 인적이 뜸했다. 태양은 오전부터 한낮처럼 뜨겁다. 카미노 조가비 표식이 새겨져 있는 비석처럼 보이는 돌들이 줄지어 있다. 길가 해바라기들은 가뭄 때문인지 바짝 말라있다. 중간에 마을 하나를 지나자 오늘의 목적지인 캐리온 디 로스 콘데스가 나온다. 알베르게는 이미 만원이다. 나는 하는 수 없이 호스텔을 찾아 걸었다.
길거리를 걷다 이전에 만났던 킴(뉴질랜드), 타냐(체코), 바바라(독일)와 마주쳤다. 그녀들은 맥주와 사이다를 혼합한 스페인 음료인 샤니를 마시며 떠들썩하게 웃고 있었다. 킴은 뉴질랜드 방송국에서 일하는데 킴의 소원은 세계여행이었다고 한다. 킴은 마흔이 되던 생일에 ‘지금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회사를 그만두고 세계여행을 시작했다고 했다. 그리고 여행 중에 만난 친구가 카미노를 걷자고 해서 이곳에 오게 되었다고 한다. 독일의 바바라는 하이킹을 좋아해서 순례길을 걷는 중이었다. 모두들 각자 다른 이유로 이곳에 왔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길 위에서 우리는 모두 순례자일 뿐이었다.
나는 성당 미사 시간에 맞추어 먼저 일어났다. 오늘 미사에는 평소보다 사람이 정말 많았다. 미사를 마치고 잠시 성당에 앉아 있다가 한적해진 길을 걷기 시작했다. 평화로움 속에 묘한 그리움과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북경의 허름한 기숙사 길을 걸으며 마냥 희망에 부풀었던 시간, 퐁텐블로의 겨울 가로등에 의지해 걷던 길에서도, 싱가포르의 화려한 마천루를 바라보던 시간에도 뭔지 모를 기대감과 쓸쓸함이 섞여 있었다.
호스텔에 도착해 보니 빈 침대에 자전거 순례객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건너편 침대 안드레스는 바르셀로나에서 왔다고 했다. 하루에 100킬로씩 자전거로 달린다고 한다. 그는 800킬로를 걷는 사람들이 너무 대단해 보인다며 언젠가는 꼭 걸어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오히려 하루에 100킬로를 자전거로 경사진 길을 오르내리는 체력이 부러웠다. 특히 길에서 만나는 여자 자전거 순례자를 보면 영화 속 여전사처럼 너무 멋졌다.
밤, 코 고는 소리로 가득한 도미토리에서 나는 다니엘에게 답장을 썼다.
[다니엘에게]
오늘은 어제처럼 멋진 풍경은 없었지만, 새벽의 길은 순례를 시작한 이래 가장 아름다웠어. 어둠을 뚫고 쏟아지는 햇살, 차가운 공기가 부드러워지고 나뭇잎들이 반짝거리던 순간 - 그냥 이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순수하게 기뻤어.
네루다라면 “시가 나에게 왔다”라고 했을 그런 순간이었거든.
오늘 성당에서 너를 위해 기도했어. 너는 충분히 품위 있고 멋진 사람이야, 내일은 회사에서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너에게 주어진 하루를 즐겨봐. 어쩌면 삶에서 두려워할 것은 그렇게 많지 않아.
신이 있다면 그 신의 선의를 믿어보면 어떨까? 어린 시절에는 우리를 돌보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믿는 게 그리 어렵지는 않았던 것 같아.
죽음을 두려워하기보다, 살아 있는 동안 충만하게 살지 못하는 게 두려운 거니까. 어쩌면 세상에는 죽음이 오지도 않았는데 마치 죽은 사람처럼 사는 이들이 많잖아. 하지만 작은 것들에 눈을 돌리면 삶의 기적은 세상 곳곳에 있는 것 같아. 오늘 새벽의 하늘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