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너무나 빠르게 구르는
수레바퀴 때문에 수레바퀴를 돌게 하는
원리를 잊고 지나간다.
원리는 형상도 두께도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원리를 포기하고
대신 쉴 새 없이 구르는 수레바퀴에 올라탄다
- 헨리 프레드릭 아미엘-
잠결에 쌀쌀한 기운 탓인지 평소보다 늦은 여섯 시 사십 분에 일어났다. 알베르게의 바는 이미 북적였지만, 따뜻한 커피와 토스트로 아침을 시작할 수 있었다. 오래된 나무로 만든 바에 앉아 있으니 마치 로드무비의 한 장면 속 배우가 된 듯했다.
길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프랑스에서 온 미셸을 만났다. 예순여덟 살인 미셸은 에너지가 넘쳤다. 우리는 옅은 분홍과 보랏빛이 번지는 아침달을 보며 감탄사를 쏟아냈다. 사진으로는 담을 수 없는 풍경이었다. 잠시 후 어제저녁에 보았던 스웨덴의 아일리와 마주쳤다. 그녀는 라벤더를 따고 있었고, 나는 걸음을 늦춰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며 걸었다
아릴리는 무릎이 아파서 천천히 갈 수 있을 만큼만 걷는 중이었다. 십 년 전부터 카미노 순례길 여행을 꿈꿨지만 고관절 수술을 해서 이제야 오게 되었다고 했다.
순례길에서도 알베르게에 빨리 도착해서 좋은 침대에서 자려고 경주하듯 걷는 사람들도 있다. 아릴리는 그날의 목적지도 없이 걷는다. 몸의 컨디션에 따라 걷다가 라벤더 밭처럼 예쁜 풍경을 만나면 한 동안 놀다가 다시 길 위에 선다. 내키는 곳에 멈추어서 하루 머물고 다시 걷지만 언젠가는 산티아고에 도착할 거라고 한다.
자기만의 리듬에 대해 생각해 본다. 남보다 빨리 가기 위해 우리가 놓치는 것들은 무엇일까? 발 밑에 작은 풀꽃들, 풀잎 위의 이슬, 간밤에 거미가 만든 멋진 거미집, 희미하게 보이는 아침달의 풍경, 이런 것들은 천천히 걸을 때만 보인다.
아릴리와 작별 인사를 하고 내 리듬에 맞추어 속도를 조금 높였다. 한참 걷다 보니 생안톤이라는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수백 년은 되어 보이는 교회가 마을 입구에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순례자를 위한 병원이라고 쓰여 있다. 이미 건물 일부가 부서진 이 교회는 한쪽은 천막을 쳐서 순례자를 위한 잠자리를 제공하고 있었다. 최대한 과거의 흔적을 유지하며 전통적 방식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돌로 만들어진 교회 구석에 앉아 과거에 이 길을 걸었던 순례객을 생각해 본다.
먹을 것과 잠자리조차 제대로 구하기 어려운 환경에서 수백 킬로 심지어 수천 킬로를 걸어서 산티아고로 가던 사람들의 마음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사람의 마음은 가장 깊은 곳에 자신을 가두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장 멀리 나아갈 수도 있게 한다. San Anton을 기억하고 싶어서 나는 순례자 목걸이를 샀다.
9월에 접어들자 날씨가 몰라보게 쌀쌀해졌다. 장갑을 끼고 스틱으로 발목에 가는 압력을 최소화하며 계속 걸었다. 엘만자노 마을의 바에 들러 핫초콜릿으로 몸을 녹인 후 다시 걷는다. 저 멀리 산을 오르는 자전거 순례객이 있다. 경사 때문에 자전거를 끌고 산을 오르고 있다. 내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오랜만에 완전히 혼자가 되어 걷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나는 잡념을 없애려 쉬지 않고 꾸역꾸역 걷는다. 어느새 발목의 통증도 희미해진 느낌이다. 경사는 더 가팔라지고 숨이 목까지 차오를 때쯤 정상이 시야에 들어왔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 몸을 가누기 어렵다. 앞으로 가는 길은 내내 내리막이다. 순례길 초반에 피레네 산맥을 내려올 때는 내리막 길이 적응이 안 되어서 다리에 힘이 팽팽하게 들어갔는데 어느덧 수월하게 내리막을 걷게 되었다.
세상은 하늘과 밀밭으로 나누어진 듯하다. 황금색 밀밭 사이를 걷는 메세타 평원. 가이드북에는 이 길이 너무 단조로워서 순례객들 중 일부는 버스를 타고 이 구간을 지난다고 한다. 메세타 평원의 단조로움 속에서 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평화로움을 느꼈다. 우리는 항상 새롭고 멋진 것들을 찾아 달려간다. 하지만 어쩌면 삶이란 이런 메세타 평원처럼 단조로운 일상에서 저 멀리 보이는 나무 한 그루가 만드는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에 가까운 것 같다.
40도에 육박하는 태양 아래, 메세타 평원에서 수많은 벌레들과 풀꽃들이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단순해 보이는 대지가 무성한 생명들을 품고 있었다.
한참을 걷다가 가만히 서 본다. 순간 속에 있는 나를 가만히 느껴본다. 바람이 머리카락과 뺨을 스쳐간다. 살아있음이 뜨거운 열기와 함께 나의 폐부로 전해진다. 우리가 아는 유일한 사실은 모든 생명은 언젠가는 소멸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죽으면 아마 메세타 평원 같은 곳에 불려 가 하느님이 이렇게 묻지 않을까
네 인생은 어땠니?
얼마나 사랑하고 살았니?
내가 준 선물들을 얼마나 즐기고 살았니?
내가 보낸 많은 천사들을 알아보았니?
나는 이 길에서 단순하게 입고 단순하게 먹고 단순하게 걷는다. 끝없이 펼쳐지는 밀밭이 끝날 무렵 한 무리 양 떼가 완전히 길을 막아섰다. 어쩔 줄 몰라서 그대로 서 있는데 양치기 아저씨가 양들을 한쪽으로 몰아 길을 만들어주었다. 나는 감사의 인사를 남기고 앞으로 나아갔다.
드디어 오늘의 목적지인 Bodilla de Camino에 도착했다. 마을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알베르게에 묶기로 했다. 이 알베르게에는 넓은 정원이 있고 바에서 요리할 수 있는 식재료도 팔고 있다. 메세타에서 잠시 봤던 독일 클라우스 아저씨와 브라질에서 온 마리아, 시몬과 나, 이렇게 넷이서 저녁을 함께 먹기로 했다. 알베르게 근처에 식당이 없어서 식재료를 샀다. 요리 준비를 하다 내가 실수로 조미료 병을 깼다. 왼쪽 팔에 상처가 나고 부엌 바닥은 삽시간에 깨진 병 조각으로 난리가 났다. 저녁을 망친 것 같아 너무 미안했는데 사람들은 다 내 걱정을 하고 바닥을 같이 치워주었다.
야외에서 순례자들과 함께 저녁을 먹으니 여행 온 느낌도 나고 피로가 말끔히 가시는 듯하다. 클라우스 아저씨는 내가 싱가포르에 근무할 때 직장 동료와 너무 닮았다. 그 친구가 20년쯤 지나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다. 그 말을 들은 클라우스는 사실은 자기도 나와 닮은 사람을 본 것 같다며 농담을 한다. 마리아는 아프리카에서 1년간 의사로 근무하다 브라질로 돌아가기 전에 카미노를 걷는 중이었다. 마리아 이야기를 들으니 국경 없는 의사회 아프리카 지역에서 일했던 라울 생각이 났다. 순례길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새로운 세상을 엿보게 되는 느낌이다. 서울에서는 삶의 방식이 다 비슷해 보였는데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다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