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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재 May 25. 2023

설익은 사람


  그녀의 동공이 흔들렸다. 다친 발을 이끌고 힘겹게 하산할 내 모습을 미리 내다본 듯했다. 구급차를 타고 내려가는 것이 어떻겠냐는 그녀의 제안을 한사코 거절하던 나의 미련함이 그녀의 측은지심을 자극한 게 분명했다.


"신발이랑 양말 좀 벗어보세요."

"네.."


  그녀의 낮고 진지한 목소리에 압도된 나는 더 이상 그녀의 제안을 거절하기 어려웠다. 양말을 벗자 크게 부은 발목과 시퍼런 멍이 스며든 발등이 드러났다. 직접 눈으로 확인하니 숨죽이던 작열감이 그제야 무릎과 허리를 거쳐 머리까지 타고 올랐다. 곧이은 외마디 신음 소리가 그녀의 등산가방을 열어젖혔다. 이름 모를 파스오일이 발등과 발목 위로 똑똑 떨어졌다.


"마사지하듯 골고루 문지르세요. 많이 다치셨네요. 어서요."

"이렇게까지.. 감사합니다."


 각자도생으로 얼룩진 나의 뇌리 사이로 그녀의 얼굴이 비집고 들어왔다. 누군가에게 이런 순수한 도움을 받아본 적이 있었을까. 없었다. 물론, 다른 사람에게 순수한 도움을 건넨 적도 없었다. 나의 어려움은 오직 나의 것이고, 그의 어려움은 나와는 전혀 무관하다고 여기며 살았다. 그렇게 살기 위해 맹세한 적은 없었지만, 모두가 그렇게 사는 줄 알고 있었다. 선행은 아주 가끔 우연히 일어나는 특이한 현상일 뿐, 그런 일은 내가 욕심부리지 않는 이상 내 인생의 테두리 밖에 머물다 갈 안개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더 고통스러웠다. 헐렁거리는 세 가닥의 인대가 역치를 넘어선 통증을 머리 위로 올려 보낼 때면, 대뇌피질에 마중 나와 있던 부끄러움이 그 신호에 올라 다시 발가락까지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단지, 그녀는 내가 모르는 세상에서 등산을 즐기고 있던 낯선 사람이었다. 만약 내가 넘어지지 않았더라면, 넘어졌더라도 크게 다치지 않아서 하산할 여유가 남아있었더라면 나는 평생 그녀의 얼굴을 본 적 없이 살아갈 운명이었을 것이다.


"이건 붕대는 아닌데, 헝겊인데, 일단 이걸로 발목을 고정해 보세요. 되도록 발을 고정하는 게 좋을 거예요. 그리고 파스는 가져요. 또 필요할 거예요."

"아 정말 감사합니다. 으.."

"정말 내려갈 수 있겠어요? 여기서 공원 입구까지 한참 걸어가야 하는데. 괜히 무리하지 말고 구급차 불러서 타고 가세요."

"네, 조금 쉬었다가 상태 보고 그렇게 해볼게요. 아마 몇 십분 쉬면 진정되어서 괜찮을 것 같아요."


  그녀는 진심으로 날 걱정했다. 갈색 등산모자에 갈색 머리칼 아래로 걱정이 드리웠다.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녀는 강건하고 균형 잡힌 몸매만큼이나 사람 좋은 사람이었다. 다 큰 조카를 염려하는 작은 이모의 진심 어린 마음을 낯선 사람에게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내게도 오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심지어 그녀는 내 마음을 모두 알고 있는 눈빛이었다. 타인의 과감한 도움에 어쩔 줄 몰라하는 설익은 요즘 세대, 독립과 자유를 갈망하면서 동시에 외로움에 몸부림치는 어설픈 어른의 마음을 그녀는 모두 이해하고 있었다.


  헝겊의 을 발등에 대자 그녀는 나머지 끝잡고 발목이었던 부분둘러 감기 시작했다. 짱짱하게 감겼다. 통증이 새어나갈 틈도 없이 헝겊은 붕대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대충 응급조치는 마무리되었다. 그녀의 선행이 아니었다면 퉁퉁 부은 발을 붙잡고 여전히 하산할 걱정만 하고 있을 미련한 얼굴이 떠올랐다.


"저, 너무 많이 도와주셔서 어쩌죠. 나중에 나으면 꼭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습니다. 연락처를 알려주시면.."

"나으려면 한참 걸릴 텐데요. 괜찮아요. 어서 병원 가서 치료하세요. 이거 드시고 힘내세요."


  나는 계속 그녀에게 받고만 있었다. 손바닥 위에서 어색해하는 젤리를 입에 넣자 조금 더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에게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결국 생각으로만 머물게 될 거라는 점이 못내 아쉬웠다. 별다른 작별 인사 없이 그녀는 등을 돌려 다시 하산을 시작했다. 십여분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은 한동안 긴 추억으로 남을 것 같았다. 오른발 옆에 덩그러니 남아있는 파스오일과 젤리 껍질, 그녀의 손길이 머물었던 헝겊의 감촉이 마음 한편을 채우고 있었다.


  혼자서 빠르게 올라갔다가 빠르게 내려오던 내 산 생활에 아주 큰 오점이 찍혔다. 풍경도, 사람도, 내 앞에서 귀여움으로 서성이던 다람쥐도 거들떠보지 않던 무뚝뚝한 내게 산은 귀중한 인연을 선물해 줬다. 깁스와 진통제의 힘으로 간신히 고통에서 벗어난 하루였지만, 일주일 전보다. 그전 날 보다 덜 힘든 하루였다. 절뚝거리며 천천히 걸을 수밖에 없게 되어 좋다. 그런 사람을 알게 되어 좋다. 내 몸처럼 다른 사람의 가장 낮은 곳을 보살필 그 마음을 느끼게 되어 기분이 좋다. 행동과 마음, 물건을 주고 홀가분하게 내려가며 미소를 띄웠을 그녀의 얼굴이 떠오른다. 나도 웃음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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