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가을, 이곳으로 이사를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이른 아침 거실 창밖에서 새소리가 들려왔다. 아래층 테라스 지붕에서 두 마리의 참새가 정답게 노는 소리였다. 한참을 보고 있노라니, 유난히 금슬이 좋았던 친정 부모님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네 살 차이의 부모님은 다정한 오누이 같았다. 이른 아침이면 안방에서 도란도란 들려오는 부모님의 나지막한 이야기 소리에 잠을 깨는 날이 잦았다. 곤히 잠든 딸이 깰까 봐 아주 작은 소리로 소곤소곤 이야기꽃을 피우셨다. 아버지는 서울에서 날아 온 자식들의 편지를 몇 번이고 어머니께 읽어드리는 일이 귀찮은 듯 보였지만, 내심으론 좋아하는 기색이었다. 초등학교를 7년이나 다녔는데도 글을 잘 못 읽는다면서 타박을 했지만, 어머니는 좀처럼 화를 내는 일이 없었다. 아버지의 타박 속에 담긴 사랑을 헤아렸기 때문이었으리라.
결혼을 했다. 당연히 친정 부모님처럼 다정하게 살 줄 알았다. 그런데 남편은 종갓집 장손이라 그런지 다정하게 말하는 것을 몰랐다. 말수가 적었던 시아버지를 닮아서 그런 것 같았다. 무심한 남편을 둔 종갓집 맏며느리로 사는 일이 힘들 때면 아이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달려갔다. 그때마다 부모님은 따뜻하게 반겨 주셨다.
이른 새벽, 언제나처럼 안방에선 도란도란 이야기 소리가 들려왔다. 왜 나는 저렇듯 다정한 부부로 살지 못하는가. 알 수 없는 눈물이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결혼 삼 년 만에 갑자기 돌아가신 시아버지를 대신하여 남편은 한 집안의 가장이 되어버렸다. 시댁은 구십 세가 넘은 시할머니를 모시고 사는 집이었다. 게다가 시누이는 자그마치 다섯 명이나 되었고, 시동생은 고등학생이었으니 어떻게 그에게 다정한 남편이길 바라겠는가.
이따금 오래된 앨범을 들춰보면, 유년의 아이들 사진에는 아빠가 부재중이다. 언제나 시댁 일로 바쁜 남편은 우리와 함께 지내는 시간이 드물었다. 그는 우리보다 자신의 집안 일이 먼저였다. 큰일을 치르고 나면 친정으로 달려갔다. 수시로 찾아오는 버거운 일을 치러야 하는 도시를 벗어나면 살 것 같았다. 그러나 친정이 아무리 편해도 일주일을 넘기지는 못했다. 그게 결혼생활이었다.
내가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신앙의 힘이었다. 아이들 셋이 모두 우유병을 물고 있을 때 아이들을 데리고 성당 문을 두드렸다. 그런 내게 수녀님은 아이들 크거든 오라고 했다. 아이들을 데리고 교리를 받기 힘들다는 이유였다. 내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수녀님은 나의 눈물에 마음이 약해졌는지 어렵사리 입교를 허락하셨다. 그렇게 나는 주님의 품에 안겼다.
아이들을 데리고 교리를 받으러 다니는 것도 즐거웠다. 봄에 시작된 교리는 겨울이 되어 끝났다. 눈이 펑펑 내리는 크리스마스를 코앞에 두고 세례를 받았다. 세례식 때 멀리서 흐뭇한 미소로 나를 바라보시던 수녀님이 불현듯 떠오른다. 사람이 보기에 안 될 것 같은 일도 하느님이 하시고자 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는 것을 체험하셨다고 하며 아이들 키우고 오라고 했던 일에 대해 미안하다고 하셨다. 성당을 다니면서 친정행도 드문드문해졌다.
지난 설 명절날이었다. 시작은아버지들이 일 년에 한번으로 모아서 한꺼번에 제사를 지내자고 하는 것이 아닌가.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복권이 당첨된 것처럼 기뻤다. 손님들이 가고 난 후, 엄마의 수고가 덜어졌다면서 아이들이 좋아했다. 나보다 남편이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인생이란 언제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며칠 전, 문학회에서 제주도로 여행을 가게 되었다. 출발 전날 밤, 남편은 흰 봉투를 건넸다. 봉투 속에는 ‘오랜 동안 수고 많았으니 맛있는 거 많이 사 먹고 좋은 시간을 보내고 오라’는 짤막한 편지와 함께 용돈이 두둑하게 들어 있었다. 그동안 종갓집 대소사를 맡아 고생했다고 주는 보너스 같았다. 도통 말이 없는 사람이라 나의 수고를 알지 못하는 줄 알았는데 뜻하지 않은 보너스를 받고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날 밤, 평생 잊을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그 이끼 낀 기와지붕 아래에서 보낸 수많은 일들을 새벽 창문을 열어 훌훌 날려 보냈다.
생각해보니 종갓집 맏며느리로 살면서 가장 많이 듣고 싶은 말이 바로 이 말이었다.
“수고했다”
뒤늦게나마 이 말이 적힌 글을 받고 보니 힘들게 생각되었던 이 자리가 꽃밭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세 아이들이 착하고 바르게 잘 커 주었으니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요즘 남편은 그동안의 미안함을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이른 아침이면 다정하게 먼저 말을 건넨다. 이제 아이들도 우리들이 나누는 도란도란 이야기 소리를 듣고 아침을 맞게 될 되었다.
오늘따라 친정집 안방에서 도란도란 들려오던 이야기 소리가 유난히 그립다.
에세이 포레 2018.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