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웠어도, 부다페스트 야경 정도면.
아침 8시 반, 프라하에서 탑승한 야간열차가 부다페스트에 도착했다.
숙소에 체크인할 수도 없는 시간, 캐리어 끌고 어디를 돌아다닐 수도 없던 터라 세체니 온천에서 오전을 보내기로 했다. 한국에서 배꼽 보이는 옷은 엄두를 못 내는 나는 난생처음 비키니를 입었고, 몸매 안 좋다며 모노키니조차 부담스러워하던 엄마도 이내 적응하고 온천욕을 즐겼다.
부다페스트에서 머무를 에어비앤비 숙소는 다른 그 어느 곳보다도 고심해서 골랐다. 부다페스트 하면 야경을 빼놓을 수 없고, 부다페스트의 야경 하면 금빛으로 물든 헝가리 국회의사당을 빼놓을 수 없으니까.
그러나 국회의사당과 다뉴브 강이 보이는 호텔은 그나마 물가가 저렴한 헝가리라고 해도 부담스러운 가격이었고, 운 좋게도 같은 뷰를 저렴하게 즐길 수 있는 에어비앤비 숙소를 발견한 것이다.
사진에서 봤던 것보다 더 허름한 건물에 도착해 체크인 가이드에 쓰인 대로 열쇠를 찾으려 했는데, 우편함과 건물 곳곳을 샅샅이 뒤져봐도 열쇠는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결국 호스트가 올 때까지 한참 기다리며 우리의 기분은 점점 가라앉았지만, 너무나도 환한 얼굴로 "기다리느라 힘들었지?"라며 안내해주는 호스트를 보니 웃을 수밖에. 허름한 외관과 달리 집 내부는 말끔했고, 무엇보다 창가 뷰는 기대 이상으로 아름다워 금세 가라앉은 기분이 괜찮아졌다.
오후 내내 강한 비가 내린다기에 걱정했는데, 다행히 늦은 점심을 먹는 동안 비가 소나기처럼 금세 그쳤다. 어쩌다 보니 어부의 요새에서 부다 왕궁을 지나 겔레르트 언덕까지 걸으며 부다페스트에 도착한 당일에 웬만한 곳에 다 가보게 되었다.
날씨도 풍경도 다 좋은 오후였으나 겔레르트 언덕에 가는 동안 또 엄마와 싸우고 말았다. 내가 구글맵을 보며 이 방향이 맞다고 해도 저기 지나가는 사람에게 길을 물어보라는 엄마, 이제껏 싸워왔던 것과 또 같은 이유였다.
"아니, 저쪽으로 가는 게 맞다는데 왜 내 말을 못 믿어? 가보고 아니면 그때 물어서 찾아가면 되는 거잖아?!"
"너는 그거 하나 물어보는 게 그렇게 어렵니? 그냥 물어보면 될 걸, 뭘 그리 싫어해?"
"그러면 엄마가 물어보든가!"
영어 한 마디도 못하는 엄마한테 그럼 엄마가 물어보라는 얼토당토않은 말을 뱉어놓고 휙 뒤돌아섰다. 하지만 우리 엄마는 결코 만만한 사람이 아니다. 바디랭귀지 동원해가며 엄마가 지나가는 현지인에게 길을 묻는 동안 (그 모습에 또 한 번 놀라며, 엄마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당시에 그렇게 생각한 티는 안 냈지만.) 나는 모르는 척 계속 길을 걸었고, 그 친절한 현지인은 손가락으로 길을 가리켰다. 그 손가락 끝이 닿은 길은 내가 말한 그 길이었다.
"거봐, 저쪽이 맞댔잖아. 앞으로는 엄마가 길 물어보면 되겠네." 라며 톡 쏘아붙이고 언덕을 오르는 내게
엄마는 길 물어보라는 말도 못 하게 하니 어디 딸 무서워서 말을 하겠냐며 눈물을 글썽였다. 내게 여자의 눈물은 무기가 아니지만, 엄마의 눈물은 무기다. 몽마르뜨 언덕의 기억이 떠올라 (그러고 보니 왜 언덕에만 오르면 엄마를 울리는 걸까) 아차 싶으면서도 "왜 또 울어? 나는 뭐 울 줄 몰라서 안 우나?"라고 되려 화를 냄으로써 당황함을 감추려 했다. 결국 우리는 프라하 카를교에서처럼 또 멀찍이 떨어져 겔레르트 언덕을 올랐다.
그렇게 도착한 겔레르트 언덕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부다페스트의 야경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운 금빛 야경을 배경으로 사진을 남기려고 무겁게 DSLR도 가져갔는데, 엄마와 싸우고 말았으니 카메라 렌즈에는 야경 자체만 담을 뿐이었다. 그렇게 아무 말 없이 엄마 옆에서 찰칵찰칵 애꿎은 야경 사진만 찍어대다가, 아무래도 이 야경을 배경으로 우리 사진을 남기지 않으면 영영 후회될까 싶어 엄마에게 여기 앞에 서보라고 했다. 보통 야경이 아니니 싸워도 별 수 없이 서로 사진을 찍어줄 수밖에.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부다페스트의 야경 앞에서 참 어색한 두 여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