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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뉴 May 25. 2020

엄마의 취중진담

부다페스트의 아픈 밤

겔레르트 언덕에서 또 한바탕 한 우리는,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서로 사진을 찍어주며 애매하게 화해를 했다.

숙소 창밖으로 보이는 국회의사당 야경이 너무 아름다워 분위기를 잡는답시고 프랑스에서 만난 친구가 선물해준 와인 한 병을 땄다. 당연히 둘이서 다 마시는 것은 택도 없는 많이 양이었는데, 남기면 아깝다고 와인을 2잔이나 마신 엄마가 취해버렸다. 와인 냄새만 맡아도 취하는 것 같다던 사람이 와인 한 잔을 다 마셔버렸으니 무리한 셈이다.


갑자기 화장실에서 토를 하고 돌아와 머리 아프다며 침대에 털썩 누운 엄마는 자는 내내 울고 화를 내고 온몸을 북북 긁었다. 포도주 알레르기라도 있는 건가 싶어 "엄마, 어디 아파?" 했더니 눈물범벅이 된 엄마는 "아파... 마음이 아파..."라며 흐느꼈다.


"마음이 아파"라는 엄마의 그 한 마디가 내 마음에 비수처럼 꽂혔다. 새벽 2시, 엄마는 더 이상 울지도, 몸을 긁지도 않고 곤히 잠들었지만 나는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아 침대에서 나와 불 꺼진 국회의사당을 바라보며 숨죽여 울었다. 처음 보는 엄마의 취한 모습, 그리고 처음 듣는 엄마의 취중진담. 그렇게 토를 하고 몸을 긁으면서도 몸이 아픈 게 아니라 마음이 아프다니. "마음이 아파"라는 그 한 마디 앞에 "너 때문에"라는 말이 생략된 것이라고 생각하니 엄마도 나도 마음이 아픈, 어두컴컴한 부다페스트의 밤이었다.




아픈 밤을 보내고, 아무도 서로에게 말을 걸지 않는 어색한 아침.

"엄마, 어제 기억나? 엄마도 술주정하더라~ 막 울고 몸 긁고 그러던데? 포도주 알레르기 있는 줄 알았어."

애써 어색한 침묵을 지워보려 먼저 말을 걸었다.

"그랬어? 엄마가 속상한 일 있으면 자다가 울고 그러더라. 속상했나 보지, 뭐."로 시작한 엄마의 대답은 어제 일에 대한 엄마의 서운함을 털어놓는 것으로 마무리되었고, 나는 또 울어버리고 말았다.


한참을 우는 날 가만히 보던 엄마는 "엄마 그냥 비행기 타고 한국 갈까?"라는, 내가 여행하면서 제일 듣기 싫은 말을 꺼냈다. 엄마와 싸울 때마다 듣는 말. 이 여행이 가치 없다고 느껴지는 말. 


나도 마음속에 묵혀뒀던 감정을 모두 털어놓았다. 엄마와 싸울 때마다 말할까 하면서도 차마 꺼내지 못한 말이었다.


나는 이제 새로운 곳에 갈 때 설렘보다 걱정이 더 앞선다고.

숙소를 아무리 좋은 데로 잡아도 체크인에 문제가 생기거나 하면 엄마가 짜증을 내고, 길을 조금만 잘못 들면 지도만 보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볼 생각을 안 한다고 뭐라 하니, 내가 모든 걸 완벽히 해야 우리가 안 싸우고 무사히 다닐 수 있다는 부담감이 있다고.

엄마는 "그 상황에 화난 걸 그냥 얘기할 뿐인지 너에게 화내는 게 아니잖아"라고 하지만, 결국 엄마를 화나게 한 그 상황을 해결해야 하는 건 나고, 그 짜증을 듣는 사람도 나라고.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며 넘어가고 싶다고.

엄마는 내가 길을 제대로 못 찾으면 뭐라 할 뿐, 길을 잘 찾았을 때는 수고했다는 한 마디를 하지 않는다고.

내가 찾은 식당 음식이 안 맞으면 별로라고 할 뿐, 맛있을 때는 덕분에 잘 먹었다고 하지 않는다고.

내가 예약한 숙소에서 문제가 생기면 짜증을 낼뿐, 한 번도 숙소가 좋다고, 고맙다고 한 적은 없다고.


눈물 콧물 흘리며 꺽꺽거리면서도 할 말 다 하는 딸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주던 엄마는, 지금껏 너무 고되게 살아와서 좋은 건 좋다고 표현할 줄 모른다고, 그래서 미안하다고 했다. 

집안의 장녀로서 책임져야 할 게 너무 많아서 뭐든 "빨리빨리" 해야 했다고, 그래서 여유가 없다고 했다. 

가진 게 없이 커서 남에게 얕보이지 않았어야 했다고, 그래서 좋은 게 좋은 거지 하고 넘어가기보다는 손해 본 것은 반드시 따지고 넘어가야 했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좋을 때 "너무 좋아"를 연발하고 흥이 나서 나도 모르게 몸을 흔드는 사람일 수 있었던 건, 사랑받고 자라왔기 때문일 거다. 

부족함 없이 자라서 때로는 여유를 즐길 줄도 안다. 굳이 서두르지 않아도 되니까.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다. 가진 게 적을지언정 아예 없진 않았기에 그럴 수 있던 것 아니었을까.

엄마는 이런 나를, 나는 그런 엄마를 몰라서 서로를 이해할 수 없었던 거다.


나의 아픔을 꺼냈다가 엄마가 수십 년 묻어뒀던 아픔을 알게 된 날. 젊은 시절 행복한 추억보다는 고된 기억이 더 많은 엄마에게는, 아빠를 만나 결혼하고 나를 낳아 키운 그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는 사실도 알게 된 날. 

그래, 나는 엄마의 행복, 엄마의 자랑이다. 이번 여행도 행복한 여행, 자랑스러운 여행이 되도록 다시, 잘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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