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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nia Dec 31. 2023

기쁠 때도 슬플 때도 있겠지

최지인, <당신의 죄는 내가 아닙니까>

파주(坡州)


                                                                   최지인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던 때

  그리고 햇살과 고요
  그저께가 오래전 같다
  기쁠 때도 슬플 때도 있겠지

  암막을 두른 작은 방에서

  잠들고 또 잠들었다 시간을 가로질렀다

  얼마간 아팠고

  잠과 잠을 엮어
  능선 따라 정상에 다다랐던 어느 날

  활짝 핀 개나리 옆에서

  불탄 숲처럼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도시의 건축물, 세상을 떠난

이들이 남긴 말

  길 잃은 철새 무리처럼

  다정으로

  다정으로
  자세를 바르게 했다



이 시는 처음 들을 때부터 직관적으로 그냥 좋았다.

읽을 때마다 현재의 나를 이해해 주는 것 같은 문장들.

마치 어린 왕자를 읽을 때처럼 그날 그 날 위로해 주는 문장들이 다르다.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던 때
그리고 햇살과 고요


슬픔을 기본 감정으로 깔고 살아가는 나로서는 마음이 자주 슬프지만 웃어야만 하는 위치에 있게 된다.

햇살과 고요가 필요하다.  

위의 문장을 만났을 때 마음에 빛이 드는 느낌이었다. 햇살, 고요.


시간은 너무 빠르고, 또 그 사이사이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난다. 분명히 어제 만난 사람인데도 아득히 먼 옛날에 만났던 것 같기도 하다.

부모가 키울 수 없어 기관에 온 아이들, 이주배경청소년들, 다양한 이유로 재소 된 부모 아래 재소자 자녀가 된 아이들. 나의 삶 깊은 곳에 자리한 사람들. 그들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되어 마음에 생채기가 날 때가 있다.

열심히 달리다 심한 몸살이 나면 그제야 긴 잠을 잔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일어났다 다시 잠자기를 반복하다 보면 무슨 요일인지도 알 수 없이 시간이 간다.

오랜 잠을 자고 자리를 털고 일어날 때쯤이면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진다.


잠과 잠을 엮어 능선 따라
정상에 다다랐던 어느 날


잠과 잠을 엮으면 한심한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상에 다다를 수 있다니.

이 문장을 만나고 스스로 한심해하지 말자 생각했다.

활짝 핀 개나리에서 눈을 들면 불탄 숲이 있다. 저 멀리 도시의 건축물 안에서 혹은 건너에서 살다 세상을 떠난 이들은 어떤 말을 하고 싶었을까.

집을 찾아가야 하는 철새가 길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래도 혼자가 아닌 무리라 다행이다.

자세를 바르게 해야 할 때에도 다정하게 다정하게 할 수 있는 세상은 참 따뜻할 것 같다.


참으로 청량한 오늘의 문장들에 감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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