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nia Jan 07. 2024

각자의 고유함이 서로를 부축한다

카밀라 팡, <자신의 존재에 대해 사과하지 말 것>

나에게 과학은 단순히 연구분야가 아니다.
과학은 감수성 없이 태어난 내가 지구라는 행성에서 살아남기 위해
꼭 필요한 도구다.
<카밀라 팡>


책 속 청량한 문장들

인간의 마음은 매우 뛰어난 정보처리 기계이며, 이 경탄할 만한 능력은 인간만이 갖춘 독특한 특징이다. (p. 19)


인공지능은 인류가 알고 있는 가장 강력한 컴퓨터, 즉 당신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컴퓨터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다. 의식적 사고, 직관력, 상상력 측면에서 뇌의 능력은 지금까지 만들어진 그 어떤 컴퓨터 프로그램과도 비교할 수 없다.(p.21)


보다시피 단백질은 팀워크와 효율적인 조직의 모범사례다. 다양한 유형이 자신의 성격에 따라 독특한 역할을 하며, 몸이 효율적으로 움직이기 위해 이들 모두 필요하다. 단백질은 서로 질투하지 않으며, 다른 역할을 탐내지도 않는다. 자존심은 낮고 생산성은 높은 환경이다. 모든 직장이나 친목 단체가 이와 같다면 좋을 것이다. (...) 인간과 사회적 행동은 이를 본능적으로 감지하지 못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아니, 감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조차 불가해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해독하고 이해할 수 있는 패턴이 그 속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서 나는 안도했다. 때로 무작위처럼 보이거나 느껴지는 것도 대개 집단 속 다양한 개인, 개인 간 상호작용의 본질, 그들이 반응하는 외부 요인으로 귀결된다. 단백질을 이해하면 당신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고 결정하는지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 단백질에서 배울 가장 중요한 교훈은 타인과 더 원활하게 상호작용하고 일하는 방법이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인간과 달리 단백질은 다름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존중하기 때문이다. (...) 우리는 매우 다양한 성격을 갖고 있으므로 더 자신감을 가지고, 남의 시선을 더 의식하며, 서로 다른 타인의 역할을 더 수용하라는 것이 단백질이 주는 교훈이다. 무리에 속하려는 기본적인 (혹은 최소한 신경전형적인) 인간의 충동을 억제하고, 우리의 기묘한 면을 찬양하며, 이것이 사회 결속에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차이는 우리가 함께 일하도록 도우며 개성은 효율적인 팀워크의 핵심이라고 단백질은 말한다. 현미경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분자가 우리에게 주는 커다란 교훈이다. 이제, 서로를 더 자세히 관찰해야 할 시간이다. (p.71-78)


삶, 사랑, 관계에 닿기 위한 자폐인 과학자의 인간 탐구기.

이 책의 한국어 부제이다.

영어 원제는 Explaining Humans.

저자인 카밀라 팡은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에서 생물화학 박사 과정을 마친 후 생물화학, 물리학, 화학, 통계학, 역학, 광학, 컴퓨터과학, 정보과학 등의 광범위한 과학기술을 활용한 생물정보학 분야에서 일하고 있다. 이 책은 영국왕립학회에서 최고의 과학책 상을 수상했다.


저자의 존재와 과학의 연관성은 대체 무엇인가? 이 책은 엄청나게 자세하고 섬세한 과학의 이야기로 인간의 감정, 소통, 관계 맺음을 설명하고 있었다.

처음 책을 펼친 순간 당황했다. 자폐스펙트럼을 가진 과학자의 책이라는 정도의 정보만 가지고 책을 열었으니, 에세이가 아닌 과학 이야기가 쏟아지는 것에 당황하는 것이 당연했다.

과학에 대한 지식이 너무나 부족함에도 카밀라 팡이 풀어내는 과학 이야기는 너무나 흥미롭게 읽혔다.

여덟 살 때 자폐스펙트럼장애를, 스물여섯 살에 ADHD를 진단받고 살아오고 있는 저자가 과학을 빌려 자신이 관계 맺고 살아가야 하는 인간들에 대해 이해하기 위한 매뉴얼을 썼기 때문이다.


그녀는 5살 무렵 자신이 엉뚱한 행성에 착륙한 게 틀림없다고 여겼다 한다. 가족의 말조차 외계어로 들리는 시간을 지나며 인간 사용 설명서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고민을 하며 과학을 탐구하는 중에 그 해답을 찾았다. 스스로를 위해 적어 내려간 카밀라 팡의 이야기들은 우리에게도 큰 울림을 준다. 그녀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우리가 지닌 다름이 얼마나 소중한지 배울 수 있다.


책을 읽는 내내 일주일에 한 번 대안학교 수업에서 만나는 스무 살 H가 떠올랐다.

경계성장애 판정을 받은 우리 H는 정직하다. 수업이 재미없으면 재미없다고 말하고, 옆에 앉는 게 싫으면 싫다고 말한다.

모두와 함께 있다가도 자신만의 시간이 찾아오면 눈을 감고 지휘를 하기도 하고, 수업 중에 갑자기 벌떡 일어나 나가기도 한다. 처음에 조금 당황해하던 학교 친구들도 그리고 나도 시간이 흐르며 그 상황이 당연해졌으며, 오히려 H로 인해 많은 것을 배웠다.  

다른 친구들과는 다른 생각의 흐름, 시간의 흐름을 가지고 있는 한 명을 통해 우리는 여유를 배웠고, 포용을 배웠고, 약함처럼 보이는 것이 얼마나 강한지, 얼마나 큰 위로인지 배웠다.

연주를 다시 시작한 후 너무나 오랜만에 큰 공연장에서 연주를 하기 직전, 무대 뒤에서 객석을 비추는 모니터를 통해 H가 관객석에 앉는 것을 보고 힘이 솟던 날도 기억난다.

H가 수업이 재미있다고 하는 날에는  기쁨을 느꼈다. 그는 나를 위로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함께 살아가는 동안 그의 존재만이 가진 고유함이 우리를 위로하고 부축하는 날이 늘어갔다.

이번 학기 마지막 날 받은 편지에 쓰인 그의 진심을 읽으며 너무 큰 위로를 받았다.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요? 에 대한 질문에 답을 한 번 더 찾은 날이었다.


쌤은 저를 이쁘게 보니까 엄마 같아요.
엄마처럼 저를 봐줘서 감사합니다.
쌤 하고 친해졌어요. 쌤 엄마 같아요.


그를 통해 우리는 배웠다. 경계성장애와 자폐스펙트럼, 그리고 '나와 다름'이 얼마나 놀라운 경험의 선물을 주는지.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누군가의 기분을 좋게 하기 위해 소위 사회생활이라는 것을 하지 못하는 그의 한마디가 얼마나 큰 울림을 주는지.


카밀라 팡은 자신이 질병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건  “내가 세상을 다르게, 편견 없이 본다는 뜻”이라고 이야기한다.

한국은 현재 이주의 배경을 가진 이들이 전체 인구의 5%를 넘어 이미 다문화사회로 진입을 했다. 통계청은 2028년에는 10%가 넘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한국은 다문화사회를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을까? 서로의 다름을 편견 없이 바라보고 서로가 서로를 해치는 것이 아니라 도움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을까?


일주일에 한 번 강의를 하는 대안학교에서 H에게 받은 편지
차이는 우리가 함께 일하도록 도우며 
개성은 효율적인 팀워크의 핵심이라고 
단백질은 말한다. 
현미경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분자가 
우리에게 주는 커다란 교훈이다. 
이제, 서로를 더 자세히 관찰해야 할 시간이다.


H는 온 존재로 나와 우리 학교에게  각자가 가진 고유함이 얼마나 서로에게 유익한 것인지 가르쳐주었다.

인간이 만든 잣대 속에서 경계정지능장애 판정을 받은 사람들, 자폐스펙트럼, ADHD를 지니고 살아가는 카밀라 팡의 존재는 놀라운 사실을 알려준다. 고유하게 태어나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보편적으로 모자르다 여겨지는 정체성이 오히려 얼마나 더 크고 놀라운 힘과 진실성을 지녔는지.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서로를 부축하여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나 홀로 다 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유한하고, 부족하고, 구멍이 있어 다행이다. 서로가 함께여야 온전한 존재, 인간. 우리는 참 아름다운 존재들이다.


다름이 두려움이 되지 않기 위해, 오히려 편견 없이 서로를 세심히 관찰하고 각자의 다름이 서로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이 책을 함께 읽었으면 좋겠다. 아니, 우리 모두가 나 자신이 얼마나 놀랍게 지어졌고 내가 가진 핸디캡마저 장점일 수 있는지를 발견하기 위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자신의 존재에 대해 더 이상 사과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삶을 사랑하기 위해,

타인과의 관계에서 기쁨을 찾기 위해서도.

이전 04화 기쁠 때도 슬플 때도 있겠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