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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나브로 Apr 16. 2020

집이라는 공간이 주는 기운

이사를 하루 앞두고, 집에게 고맙다고 나지막이 인사를 남긴다.

정든 집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이 하루 남았다. 내일이면 이사를 간다. 이사 날짜가 코 앞에 다가오고 약 6년 간 살아온 집을 떠나려니 집 안 구석구석에 눈길이 머문다. ‘참 잘 살았다. 참 좋은 집, 좋은 동네야.’라는 혼잣말이 나온다. 이 집은 우리 부부의 첫 신혼집이다. 결혼을 하고 신혼집에 자리를 잡고, 그 사이 우리 부부에겐 가족이 두 명 더 늘었다. 아이가 생기면서 조금 더 꿈꾸던 가족의 형태를 갖추고 익숙한 가족이 되어가기까지 이 집, 이 공간의 덕을 많이 봤다.


그러고 보니 이 집의 첫인상은 0점이었다. 처음 부동산의 소개로 방문한 집은 어두컴컴 동굴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해가 잘 드는 남향집에 저층이 아닌 집인데도, 준공한 지 20년이 넘은 아파트에 오래도록 리모델링 없이 세입자 분이 살아온 집은 너무 많은 짐들로 꽉 차 있어 좁고 어두워 보였다. 첫인상이 어둡고 칙칙했던 이 집은 절대 신혼집으로 살지 않으려 생각했지만, 결국엔 이 집을 선택하게 되었다. 우선 시세 대비 조금 저렴했기에, 그 비용을 아껴 인테리어를 멋지게 하면 다른 분위기를 낼 거라며 남편은 나를 설득했다.

 

결혼 준비는 한정된 예산 안에서 부부의 우선순위에 따라 선택할 것들이 산더미이다. 집 인테리어 또한 결혼 준비와 함께 크게 한몫하며 선택과 결정의 연속이었다. 전체적인 컨셉을 잡고 나면, 벽지는 일반 벽지로 할 건지 실크 벽지로 할 건지, 색상은 무엇으로 할 건지, 바닥은 장판을 깔지 마루를 깔지, 마루의 두께와 패턴과 색상은 어떤 걸로 할지, 화장실 타일은 어떤 색과 자재로 할지, 싱크대는 어떤 걸 원하는지, 조명은 어떻게 할지 등등 무한대의 선택지 안에서 고르고 정하는 작업을 반복했다. 당시 우리는 블랙&화이트의 모던한 컨셉을 잡고 인테리어를 진행했는데 그땐 몰랐다.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 알록달록 총 천연색의 쨍한 컬러감의 장난감으로 집이 가득 차게 될 줄은, 방 문과 벽지에 아이의 스티커와 그림으로 도배가 될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아이가 태어나면 아이 방으로 쓰리라 상상하며 방 하나는 상큼한 파스텔 톤의 민트 컬러의 벽지로 도배를 해서 꾸몄으나, 그땐 몰랐다. 아이가 태어나면 아이 방에서 자고, 아이 방에서 놀고 할 줄 알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은 밤 수유를 위해 안방에서 자고, 거실에서 놀게 될 줄은. 일단 거실에 주로 엄마, 아빠가 있기에 아이는 아이 방에서 장난감을 굳이 끌고 나와 거실에서 함께 놀기를 원했다. 우리는 아이에 대한 환상만 있었지, 현실은 전혀 모르던 어린 신혼부부였다.


결혼을 하고 신혼생활을 할 때 나는 유독 이 집을 낯설어했다. 데이트하면서 헤어지기를 마냥 아쉬워하다가 함께 시작한 신혼생활은 달콤했지만, 유독 친정엄마 집에 가서 저녁을 먹고 온 날은 기분이 다운됐다. 남편 앞에서 펑펑 운 적도 있다. 엄마와 아빠, 동생이 함께 북적거리고 익숙한 집에서 생활하다가 둘 만 있는 집은 낯설고 내 집처럼 느껴지지가 않았다. 집에 겨우 두 사람만 산다는 게 너무 어색했다. 우리 부부의 사진을 거실과 안방에 액자로 걸고, 집에 추억이 담긴 소품을 꾸미기 시작하면서 집에 대한 낯섦은 점차 사라져 갔다. 집에서 둘이 함께하는 취미 활동이 생기고 시간이 지나면서 집은 그 어떤 곳보다도 편안한 공간이 되었다.


결혼 준비를 할 때는 주말이면 집 근처에 있는 카페거리에 가서 함께 브런치를 사 먹는 신혼생활을 상상했다면, 현실은 브런치를 사 먹을 돈으로 삼겹살을 사서 함께 구워 먹는 일이 훨씬 행복했다. 원두를 수동으로 갈아 커피도 내려 마시고, 라거 맥주부터 흑맥주까지 우리가 원하는 맛과 향의 수제 맥주도 담그고, 견과류를 아낌없이 듬뿍 넣은 식빵도 구워 먹고 둘이서 좋아하는 걸 함께 만들어 먹었다. 친한 지인들은 모두 개별로 집에 초대하여 정성스러운 식사를 대접하였다. '사람들을 집에 초대하는 것은 그들을 우리 자신에게 초대하는 것'이라는 오프라 윈프리의 말처럼, 우리에겐 소중한 사람들을 사적인 공간인  집에 초대하는 일이 즐거웠고 집이라는 공간은 우리의 관계를 더 가깝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남편을 쏙 빼닮은 아이들이 태어나고, 아이가 자라며 집은 아이의 흔적들로 가득 채워졌다. 4살 때 그린 엄마, 아빠의 만득이처럼 생긴 얼굴 그림, 둘째를 임신했을 때 엄마 배를 보고 상상하며 그린 그림, 동생이 태어나고 동생과 놀이터에 나가는 모습을 꿈꾸며 그린 그림에 우리 가족의 과거와 지금, 미래가 모두 담겨 있다. 아이가 그린 다듬어지지 않은 선, 느낌대로 선택하여 채색한 색상, 삐뚤빼뚤한 글씨가 조화를 이루어 엄마 눈엔 하나의 추상적인 작품으로 보인다. 아이의 작품이 여전히 벽에 스카치테이프로 붙어 있고 이제 내일이면 이 집을 떠난다 생각하니 시원하기보단 아쉬움이 더 크다.

아이가 그린 그림을 전시하던 공간

이 집에서 좋은 기운을 많이 얻어 간다. 집이라는 공간은 가족이 모이고 쉴 때, 에너지를 발산한다. 안심되고 포근한 그 공간에 머무는 우리들의 상태를 치유해준다. 최근 코로나 19로 인해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진 건 집의 가능성을 재발견하기에 참 좋은 기회이다. 유치원 개학이 무기한 연기되며 아이랑 하루의 모든 시간을 집에서 보낸다. 집에서도 색종이만 있다면 하루 종일 미술놀이를 할 수 있고, 티비로 유튜브를 틀고 어린이 요가를 함께 따라 하면 우리 집 거실은 엄마와 아이가 함께하는 요가원으로 변신한다. 집뿐만 아니라 우리 동네도 살면 수록 좋다고 느꼈다. 뚜벅이인 나는 유모차를 끌고도 걸어서 나갈 수 있는 산책로와 도서관, 빵집이 있어 좋았다. 아이랑 밖으로 나가 익숙한 집 앞 놀이터 말고 새로운 놀이터를 찾아 모험을 떠나도 매번 새로운 놀이터가 나타날 만큼 주변에 놀이터가 많아 좋았다.


익숙한 동네와 집을 떠나는 건 아쉽지만, 집에 대한 기억마저 떠나보내는 건 아니다. 이삿짐과 함께 집에 대한 추억도 잔뜩 챙겨 간다. 내일 이삿짐센터가 오기 전까지 집안 구석구석을 눈에 더 담으며, 그동안 우리 가족을 응원하고 소중히 품어준 집이라는 공간에 고맙다고 그동안 정말 고마웠다고 나지막이 인사를 남긴다.

집을 나서는 우릴 향해 매일 '굿럭!' 이라고 외쳐주는 삐에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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