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6일 게스트 하우스
12월 26일 21시 30분 계속 게스트하우스
갠지스 강 위에서 보트를 타기 위해 철수네 카페로 다시 갔다. 한 번 왔던 길이라고 금세 찾는다. 익숙한 느낌의 골목으로 들어가니 한 번에 철수네 카페가 나왔다. 친구가 길 잘 찾는다고 놀랐는데 사실 내가 더 놀라긴 했다. 덤덤한 척했지만 사실 길 잃으면 어쩌지 라는 생각을 했었다.
덕분에 이 근방 길이 머릿속에 확실히 각인되었다. 이렇게 머릿속 지도 한 편이 업데이트되었다. 항상 여행을 다니면 이렇게 지도 위에 내가 갔던 길들이 적히는 기분이 든다. 낯선 도시가 하나씩 익숙해지며 도시를 알아간다. 도시가 나를 길들이는 건가 싶기도 하다. 조금씩 열어주며 더 궁금하게 만들고, 더 다가오게 만든다. 더 이상 낯설지 않을 때 떠나야 하는 여행자를 위해 밀당하는 그런 재미. 그래서 여행은 걸어 다닐수록 좋다.
카페에 앉아서 쉬고 있으니 다른 사람들도 들어왔다. 모두 한국인들이다. 역시 한국인끼리 모이니 수다가 끊이지 않는다. 우리야 인도에 온 지 이제 3일밖에 되지 않았지만, 한 달간 이미 여행을 하고 있던 분들, 여러 번 인도를 다녀온 덕분에 이번에는 지인을 가이드해주기 온 분, 혹은 아예 인도에서 일하면서 사는 분 등 세상 다양한 여행의 이야기가 한국어로 이곳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야기하면서 놀다가 4시 30분쯤 같이 갠지스강으로 내려갔다. 여기서도 한 커플이 대기 중이었다. 추우니까 모닥불에 손 녹이면서 기다리는데 철수 씨가 지나가는 짜이 아저씨한테 짜이를 사 돌렸다. 운치 있었다. 갠지스 강을 바라보며 모닥불 앞에서 마시는 짜이. 지극히 바라나시 여행자스러워 좋다. 드디어 우리는 보트에 올랐고, 갠지스 강 위로 출발했다.
아, 철수 씨 덕분에 오늘따라 왜 이리 사람이 많은 지에 대한 궁금증이 풀렸다. 오늘이 일식인데, 월식이나 일식 때면 액운을 없애기 위해 갠지스 강의 신성한 물로 씻어내거나, 물을 떠가려고 많이 찾아온다고 한다. 근데 이번 겨울 날씨가 너무 추워서 별로 사람들이 없는 편이란다. 인도는 대단하다. 마치 광화문 광장 거리응원처럼 사람들이 이미 가득 차있는데 이게 얼마 없는 거라니. 사람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발 디딜 틈이 없다는 게 놀랍기만 하다. 종교의 의미가 거의 사라진 우리나라에서는 이제 크리스마스나 부처님 오신 날도 큰 모임은 없는데, 일식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이다. 종교가 아직 삶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인도인들의 모습이었다.
드디어 시간이 되었고 우리는 배를 타고 갠지스 강 위로 올랐다. 말로만 듣던 갠지스 강이다. 우선 강 건너 모래사장부터 갔다. 해운대 백사장처럼 넓은 모래가 펼쳐졌는데 사실 여기도 강 위다. 우기 때는 건너편 숲까지 물이 찬다고 한다. 여름에 와서 한 번 보고 싶기는 하다. 살인적인 더위만 견디면 저 멀리까지 물이 들어선 모습을 볼 수 있을 텐데. 아 그렇게 되면 가트 오기도 전에 강물이 불어나 위험한가.
철수 씨는 바라나시의 어원부터 문화를 모두 말해주었다. 바라나시는 힌두교에서 중요한 시바 신과 강의 신이 만나는 신성한 곳이다. 때문에 수천 년 전부터 힌두교인들의 성지로 신성하게 여겨졌다. 그래서 힌두교인들은 이곳에서 목욕재계를 해야 전생과 현생의 업이 씻겨 나간다고 믿는다. 힌두교라는 종교 밖에서 이 행위를 바라보는 우리에게는 단지 더럽다는 생각이 들지만, 이들에게는 이것이 삶이고 영혼의 숙명인 셈이었다. 이렇게 성스러운 강가에 고대 귀족들이 갠지스강에 신에게 기도하는 사원을 계단식으로 만들었는데 그 이름이 바로 가트다. 때문에 이 도시의 이름을 바라나 가트부터 아씨가트까지 라는 뜻으로 바라나시라는 이름이 지어졌다는 것이다. 이토록 신성한 강이니 일식이 있는 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이었다. 역사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태양을 삼켜지는 일식은 불길한 날이기 때문에 그 액운을 이곳에서 씻어 버리는 힌두인들이었다. 일식을 직접 관찰하기도 하고 수십 년 후에 일어날 일식도 미리 예측하는 현대임에도 종교적 삶을 사는 이들에게는 자신들의 영혼을 씻어내는 것이 중요한 행위였다.
모래사장 위에서 일몰을 보는 것이 이 투어의 첫 시작인데, 일몰을 보기에 미세먼지와 구름이 잔뜩 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서 아쉽다. 언젠가 다시 보러 오라는 의미로 해석해야지. 신의 뜻인 셈이다. 내 탓이 아니라.
다시 배에 탄 우리는 이번에 가트 주변의 장례식을 보러 떠났다.
보트가 화장터로 가까이 가기 전에 우리를 가이드해 주던 철수 씨가 경고한다.
“화장터 가까이 가서는 사진은 찍지 마세요.”
인도인들이 윤회를 믿는다고 해서 슬퍼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화장터에 서 있는 사람들도 속으로 슬퍼하고 있었다. 하지만 화장터에서 유족들이 슬피 울면 망자가 편하게 가지 못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저들도 지금 눈물을 참고 있다는 철수 씨의 설명이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화장터에 가까이 가더라도 화장하는 모습은 사진은 찍지 말아 달라며 간곡히 부탁했다. 정 이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싶다면 멀리서 찍어 달라고 했다.
그동안 힌두인들은 윤회를 믿기 때문에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다고 잘못 알고 있었다. 힘든 삶을 살아왔고 내세에는 더 좋은 삶을 산다는 믿음이 있으니 누군가 죽어서 화장을 하는 것도 슬픈 일이 아니라 생각했다. 그러니 화장터를 관광객이 보더라도 그냥 둔다고 착각했다. 하지만 이들도 누군가 떠나보낸다는 슬픔은 존재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서 천국을 간다고 하거나 더 나은 삶으로 다시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내 곁에 있던 사람이 떠난다는 것은 큰 슬픔이다. 아무리 믿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죽음으로 갈라진 인연을 그리워하며 슬퍼하지 않을 자가 누가 있을까.
설명을 듣고 나니 엄숙해졌다. 조용히 화장을 지켜봤다. 불이 붙은 나무에선 뿌연 미세먼지를 뚫고 굵은 연기가 올라왔다. 삶은 다한 육신이 타올라 사라지며 나오는 뜨거운 에너지를 둘러싼 망자의 지인들은 묵묵히 그 연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화장터에 서 있던 그들의 눈에도 슬픔이 묻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장례식에는 알지도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세계 곳곳에서 찾아와 주변을 에워싸고 관광하였다. 그들의 친구, 가족 혹은 배우자의 마지막 가는 길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며 누군가는 사진을 찍었다. 물론 그 관광객들의 눈에는 안타까움이나 그리움보다는 신기함과 호기심이 가득했다. 죽음은 관광 상품화가 되어 있었지만 화장터에서 망자의 마지막 모습을 바라보던 망자의 가족과 지인들에게는 개의치 않은 듯했다. 쏟아지는 시선들을 막기보다는 돌아가신 분의 마지막 길을 더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믿음으로 더 좋은 삶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슬픔을 가슴에 욱여넣고 있었다.
곁에 함께 서 있던 사람들 중 아들로 보이는 사람이 화장이 끝나고 타고 남은 재를 뒤적거렸다. 그리고는 아직 뜨거운 기운이 남은 재와 유품들을 골라내 강으로 던졌다. 신성한 기운이 가득한 갠지스강에 죽은 자의 온기를 담아 던지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마음이 먹먹해진 채로 배를 타며 주변 화장터를 둘러보는데 이번엔 철수 씨가 세속적인 이야기를 해 주었다. 철수 씨는 배에 탄 우리에게 바라나시에서 가장 부자인 사람이 누군지 아냐고 물었다. 바로 화장터 주인이었다. 대대로 물려받는 화장터는 계급에 상관없이 이곳에서 화장을 해야 하고, 전국에서 몰려오기 때문에 일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비싼 나무를 쓰던지 싼 나무를 쓰던지 이곳에 있는 나무를 사야 하고, 그리고 태우고 남은 시체는 바로 갠지스강으로 던진다. 시체를 화장할 때 금붙이를 함께 태우는데, 이것 역시 화장터 주인이 긁어간다고 한다. 화장 비용 + 나무 비용 + 금붙이까지 24시간 돈이 들어오는 구조라고 한다. 다른 화장터들도 어쩔 수 없으면 가긴 하지만 이곳에 있는 가장 큰 화장터보다 풍수지리상 신성성이 덜하기에 잘 안 간다고 한다. 계급보다 앞서는 돈과 자본주의다. 모든 것이 신성함과 믿음으로 굴러가는 줄 알았는데 철저히 자본으로 굴러가는 인도다.
화장터 구경을 마치고 이제 그 유명한 뿌자를 보러 갔다. 뿌자는 브라만이 강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인데, 부자들이 돈을 대주고 대신 제사를 지내주면서 조금씩 변질되기 시작되었다가 이제는 대학생들을 월 3천 루피에 알바로 쓰는 관광상품이 되었다고 한다. 이 의식 자체가 브라만이 돈 벌기 위해 유지되는 관광상품이 아닐까 생각이 된다. 하긴 신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 세상에서 많은 종교의식이 돈을 위한 수단으로 바뀌어 가고 있으니 말이다.
한 참 보고 있는데 어느 순간 조금 지루해졌다. 처음에는 신기하지만 눈이 맵고 배가 고파 이제 돌아가고 싶어졌다. 솔직히 언제나 이런 공연은 한 5분 정도만 신기하고 그다음부터는 조금 지루해진다. 한 아저씨가 배고프니 돌아가자는 이야기를 꺼냈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나 보다. 한 시간 조금 더 걸린 보트 투어를 마치고 우리는 선착장으로 돌아갔다.
갠지스강 보트에서 내린 우리의 가장 큰 고민은 어느 식당으로 갈까였다. 철수 씨는 고민하는 우리에게 괜찮은 인도 음식점을 추천해 줬다. 같이 보트를 탔던 한 커플이 함께 가자고 했다. 그러니 또 다른 커플도 함께 가자고 제안해 총 6명의 식신원정대가 인도 음식점 특집을 시작하게 되었다. 샤프란이라는 레스토랑이었는데 다행히 우리 숙소 근처였다. 밤이 어두워져서 걱정했는데 동행이 생겨 다행이었다. 보통 낯을 많이 가려 누구와 함께 가자는 말을 못 하는데 먼저 말을 건네줘서 다행이었다.
식당에 온 우리는 각자 알아서 먹고 싶은 음식들을 주문하고 다 같이 잔치하듯 나눠 먹었다. 동행 구하니까 이런 재미가 있었다. 먹으면서 이제 각자 이야기를 나누는데 다들 멋있었다. 30대 초반의 여행 중반의 커플, 20대 후반에 우리와 동갑으로 보이는 커플이었다. 그중 나와 나이가 비슷한 여자분이 너무 멋있었다. 똑같은 20대 후반인데, 이미 대기업을 다니다가 자기 길이 아니라 퇴사한 분이었다. 나는 날라리 대학생으로 놀면서 학교를 다니던 시기에 이미 자격증에 인턴에 여러 스펙을 쌓고 취업을 했었고, 자기 꿈을 찾아 다시 새로운 공부를 하고 있고, 동시에 여행에 서핑에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확실히 한다. 머릿속에 스위치가 있어서 할 땐 하고 놀 땐 노는 건가. 너무 멋있다. 그리고 부럽다. 나는 내 앞길도 안정하고 이렇게 놀러 다니는데. 약간 우울했는데 음식이 나오니 기분이 나아졌다.
나는 버섯이 들어간 도사를 주문했다. 쌀가루로 만든 반죽 위에 버섯과 감자, 계란 등을 올려 다시 반죽을 덮은 후 구워낸 음식인 도사는 빈대떡과 비슷한 식감에 군만두 혹은 전병 비슷한 맛이 난다. 그리고 같이 간 친구는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주문했는데, 감자전 비슷한 음식이 나왔다. 그리고 이어 다른 분들이 주문한 커리와 난, 닭고기 국수, 안에 계란과 치즈가 커리 소스에 버무려진 빵, 탄두리 치킨 등이 서빙되었다. 팀당 500루피 정도 나왔으니 저렴하기도 하다. 여행 이야기도 푸짐하게 나누고 배불리 먹고 참 한국인들끼리 있으니 신기하고 재밌다.
20대 커플은 이제 델리로 가는 기차 타야 하는 시간이 되어 서둘러 떠났고, 남은 우리 넷은 마지막으로 라씨를 먹으러 떠났다. 바라나시의 밤이 위험하긴 하지만, 대로변을 따라 경찰과 사람들이 아직 분주하게 다니니 괜찮았다. 그리고 혼자보다는 둘, 둘보다는 넷이지 않은가. 구글 지도로 찾으며 돌아다녔는데 식당은 많아도 찾는 라씨집이 보이지 않았다. 애매하게 마무리되었지만 나중에 다시 만나기로 하고 어쩔 수 없이 거기서 인사하고 헤어지고 숙소로 돌아갔다. 다행히 둘이 돌아가는 숙소는 코 앞이었다. 5분 만에 숙소로 도착했다.
숙소 앞에서 과자랑 물을 조금 사서 상민이는 침대에서 쉬고, 나는 여기 옥탑에 올라와 일기 쓰고 있다. 혼자 일기를 쓰고 있으니 어제처럼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아침에 만난 영국인과 그의 친구, 출장 온 인도인, 눈매가 무서운 캐나다인 이렇게 오묘한 조합이다. 갠지스 강에서 비롯된 4대 문명부터 시작해 인류, 유전자, 헤겔, 여행까지 각각의 목소리와 자신들의 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인도판 알쓸신잡을 찍었다. 여행의 즐거움 중 하나다. 단점은 내가 알아는 들어도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것. 영어가 틀릴까 봐 걱정하는 것도 있고 제대로 못 알아들었을까 봐 걱정하는 것도 있다.
소심하게 그냥 듣고 이렇게 글로만 쓰고 있다. 어디에 어떻게 끼어들지 못하고 듣고만 있다가 가끔 한 마디씩 하고 있다. 글 쓰는데 앞에 대마에 취한 캐나다 친구가 신경을 조금 건드리는 거 말고는 괜찮다. 대마를 권유하길래 안 핀다고 했더니 아시아인들이 다 그렇다고 말하면서 나약한 존재라고 한다. 영국 친구가 착하다. 아침 담배 인연 때문인가 캐나다인에게서 보호를 해준다. 인도인 친구도 자기도 아시아인이라고 농담을 건네지만 캐나다인은 아시아는 한중일뿐이라며 인도는 그냥 인도라는 식으로 인종 차별적 언행을 멈추지 않는다. 하지만 맞는 걸 어쩌지. 유교 문화권에서 나고 자라 준법정신이 너무 투철해 한국에 돌아가 혹시 모를 불시 검사에도 걸리지 않고 싶으니 말이다. 대마의 위험함보다 범죄자가 되는 것이 더 무섭다.
나를 빼고 다섯이서 대마를 돌려 피고 나는 담배 피우고 있는 중이다. 미세먼지 자욱한 옥상에 연기가 더해진다. 올라와서 대화를 너무 많이 했더니 목이 아프다. 언제부턴가 나는 보호하는 친구들이 하나둘씩 생긴다. 너무 유약한 이미지라 그런가. 학창 시절 때도 그렇고. 유럽 여행을 가서도 그렇다. 그래 차라리 내가 나를 지키지 못한다면 이렇게 지켜주는 사람과 같이 있어야지. 사람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결국 같이 사니까 나를 공격하는 것도 사람이고 나를 지켜주는 것도 사람이다.
내일은 이제 기차를 타고 아그라로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