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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희성 Oct 18. 2023

인도 기차를 타다 길을 잃었다

12월 28일 기차 안

12월 28일 11시 1분 기차

16시간째 기차에 있다 후후. 멈추지 않는 폭주 기관차. 아니지 솔직히 폭주는 하지 못하고 느린 속도로 가니까 그냥 기관차. 폭주라도 해 주었으면 할 정도로 지루하다 이젠. 연착에 연착을 거듭하며 아직도 철로 위에 머물러있다. 어제 일기를 쓰다가 지루해져서 잠시 넷플릭스에 다운로드해 둔 영화 좀 보고, 책 좀 읽다가 나도 모르게 잠들어버렸다. 그리고 다시 자다 깨다 하던 일 반복하고. 끝없는 열차의 전진하는 진동 속에 생각이 드는 것은 여행과 관광이다.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나는 왜 여기에 왔을까.



어제 일기를 이어가자. 우리가 게스트하우스를 나와 기차역으로 떠나기 위해 짐을 챙기고 있을 때, 매일 밤 루프탑에서 같이 이야기하던 친구들도 먼저 나가면서 인사를 했다. 자이푸르로 가서 머문다니 또 만날 수도. 여행에서 생긴 인연을 이어가는 경우도 있지만, 이처럼 흘러가게 두다 언젠가 다시 만나 더 큰 기쁨을 기대하기도 한다. 


숙소 주인이 게스트하우스에서 역까지 100 루피면 오토릭샤로 간다고 했으니 그 정보를 가지고 나가자마자 릭샤를 잡았다. 바로 200부터 부르길래 여기 주인이 100이면 된다고 말했더니 120으로 흥정에 성공했다. 큰 짐이 두 개나 있으니 20루피 정도 더 줄 만했다. 하지만 출발을 하자마자 뒤에 실어둔 짐을 떨궈버렸다. 불안해서 갈 수 있겠나 싶었는데 이번에는 가다가 사탕도 하나 사 먹고 친구도 만나서 수다도 떨면서 기사가 여유를 부렸다. 우리가 너무 돈을 깎아서 그랬나 싶다. 빨리빨리 가자고 재촉하니 그제야 떠났다.



역에 도착하니 역은 말끔해 보였다. 그 악명 높은 인도 기차역이 맞나 싶었다. 그런데 그 악명 높은 인도 기차가 맞긴 했다. 전광판에 한 시간 연착되었다는 표시를 본 우리는 할 게 없으니 저녁이나 미리 먹어두기로 했다.  길 건너 역 앞 시장이 있는 듯 하니 가서 마지막 바라나시 식사를 하기로 했다. 길 위에 차가 그렇게 많고 소와 오토바이도 자유롭게 다니는데 자연스럽게 도로의 흐름을 타고 길을 건넜다. 이제 복잡한 인도의 도로에 적응한 듯했다.


역 근처 허름한 식당 중 가장 괜찮아 보이는 식당을 찾았다. 카운터에는 딱 봐도 보스처럼 생긴 사람이 앉아 있고 분주하게 직원들이 돌아다녔다. 손님은 없는데 바빠 보였다. 배달이라도 하는 건가. 빨락 빠니르(시금치와 인도 치즈가 들어간 커리), 버터 들어간 커리를 주문했다. 음식 나오기 전에 화장실 잠시 들렸는데 주방 쪽을 통해 2층 화장실을 이용해야 했다.



주방을 처음 봐서 신기해서 사진 한 장 찍어도 되냐고 하니까 기쁘게 포즈를 잡아 주었다. 한국에선 이제 찾을 수 없는 비위생적인 주방을 찍어보고 싶은 것이었는데 요리하는 자신의 모습을 찍는 줄 알아서 사진 찍자고 한 것이었다. 이거나 저거나. 추억에 남길 사진만 찍으면 되지 하고 함께 사진을 찍었다. 돌아가면서 사진을 찍으니 다들 자신들을 찍는 사람이 처음이라고 즐거워했다. 평범한 일상의 한 페이지인 당신들이 여행 중인 우리에겐 소중했다. 밝게 사진을 찍어주니 기분이 좋다.


사실 주방의 비위생적인 환경이 어린 시절 우리 예전 식당들이 생각나서 낯선 향수가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확실히 우리나라가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바꿨다. 당연하다 생각했던 것들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게 되었다. 예전에는 식당에서 담배 피우는 것도 자연스러웠고, 반찬 재활용은 물론이었고, 부엌 찌든 때는 경력의 상징이었는데... 위생법과 단속이 강해져 한국에선 쉽게 볼 수 없다. 그래서 그런가 이런 찌든 때를 환영하지는 않지만 낯설지 않은 기분이다.



주문한 식사가 나오고 마지막 만찬을 하는데 밥이 질어서 수저로 퍼서 먹기 편해서 좋았다. 그동안 밥은 너무 꼬들거려서 쉽게 수저로 퍼기 힘들었는데 여긴 약간 한식에서 먹는 밥의 느낌이 있다. 무엇보다 한국에서는 시금치라는 이유로 쳐다도 안 보던 빨락 빠니르가 너무 맛있었다. 색은 약간 무섭지만 적당한 향신료와 치즈의 맛이 밥과 잘 어울렸다. 



밥을 다 먹고 옆에 포장마차처럼 생긴 작은 상점에서 기차에서 지낼 일용할 양식을 샀다. 다시 기차역에 앉아서 한 시간 정도 더 기다리니 기차가 도착했다. 무려 두 시간밖에 연착을 하지 않아 놀랐다. 처음에는 생각보다 더 빨리 와서 우리 기차가 아닌 줄 알았다. 인도 기차는 기본 세 시간씩 연착하는 줄만 알았다. 서양에서 온 듯한 여행자들이 우르르 기차에 타길래 아 이분들도 아그라로 가겠구나 싶어서 따라 탔다. 바라나시에서 아그라로 가는 코스가 가장 인도여행 대표 코스이니 관광객이라면 당연히 타겠다 싶었다. 혹시 몰라 인도인에게 한 번 더 컨펌을 받고 겨우 안심하고 탔다.


다만 기차 예약을 한국에서 인터넷으로 했는데, 조금 늦게 하는 바람에 친구와 한 량 떨어진 칸에 내 침대가 배정되었다. 기차 안이지만 인도에서 처음으로 혼자 돌아다니는 시간이 되었다. 침대 안에 배낭을 비스듬히 해 두고 누우니 괜찮았다. 바로 옆이 창문이라 찬바람이 조금 들어와 추웠다. 어쩔 수 없이 바닥에 까는 이불 같은 것을 창문에 고정해 조금이라도 찬 바람을 막아 보았다. 



복도를 사이에 두고 6개의 침대가 하나의 객실처럼 구성되어 있었다. 내 자리는 1층 침대였는데 2층 침대에는 아무도 없고, 건너편 4개의 침대에는 일본인 친구 두 명과 인도인 부부 두 명이 자리 잡았다. 부부는 기차가 출발하자마자 침대에 달린 커튼을 쳐 버렸다. 일본인 둘은 그나마 먼 타국에서 같은 아시아인을 만나 안심을 했는지 함께 이야기를 시작했다. 여행, 한국, 일본 등 한 시간 가량 수다를 떨었다. 중간중간 노제팬이나 그런 말하기 힘든 주제가 나오면서 어색한 순간들이 찾아왔다. 그래도 말은 잘 통해 다행이었다. 한국에 자주 와서 한국어도 조금 할 줄 아는 친구였다. 이야기를 마친 후에는 나도 커튼을 치고 넷플릭스 조금 보다가 잠이 들었다. 중간에 다른 역에서 탑승한 인도인이 자기 자리인 줄 알고 내 커튼을 열어본 것 말고는 잘 잤다. 혹시 몰라 모든 옷을 꺼내 입은 덕분인지 많이 춥지는 않았다. 




21시 50분 아그라 호텔

오늘 하루 참 다사다난했다. 아니 사실 인도 오고 나서 다사다난하지 않은 날이 있던가? 매일 새로운 일과 사건이 일어난다. 지금은 호텔이다. 오랜만에, 아니 이번 여행에 처음으로 더블룸을 잡았더니 긴장이 풀어진다. 아늑하고 좋다.


시간을 거슬로 오늘 낮으로 돌아가보자. 일기를 다 쓰고 나서도 기차는 멈추지 않았다. 혼자 심심하니 책 읽고 놀고 다시 책 끄적이길 반복했다. 이미 도착해야 하는 시간은 한참 전인데 기차가 달리던 이유는, 알고 보니 기차가 새벽에 엄청나게 연착을 했고 무신 일이 생겼는지 가는 길을 바꿨다. 목적지는 같지만 가는 길목이 바뀌었달까. 어쩐지 지도상 GPS 위치가 자꾸 이상했다. 인터넷은 안되어도 GPS는 되니 계속 체크했었는데 뭔가 이상하긴 했었다. 우리로 치면 부산으로 가는 기차가 대구를 경유해서 가기로 했었는데 대구가 아닌 포항으로 간 다음 부산으로 가게 되었달까. 이렇게 달리는 도중에 경로를 바꿔도 되는 건가 싶지만 항의하기엔 말도 깡도 부족하니 그러려니 하고 있었다.


하지만 혹시 모르니 우리의 목적지인 아그라로 가는지 안 가는지 물어보았다. 안 간다고 한다. 아그라 역으로 가지 않고 가까운 도시를 걸쳐 다른 도시로 가는 셈이다. 이게 말이 되나 싶지만 방법은 두 개뿐이었다. 타지마할이 있는 아그라를 건너뛰고 그냥 목적지인 자이푸르로 안전하게 가거나, 10분 안에 도착하는 역에 내려서 아그라로 버스나 택시나 뭐든 타고 가는 방법이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타지마할을 포기하고 확실한 여행을 선택하느냐, 아니면 불확실해도 새로운 곳을 찾아다니는 오래된 여행의 뜻을 찾아 나서냐는 고민 사이에 서 있었다. 


고민 끝에 우리는 내리기로 했다. 어쩔 수 없이 아그라와 가장 가까운 도시인 ‘아치네라’에 내리는 수밖에 없었다. 사실 아그라에는 타지마할밖에 볼 것이 없기에 타지마할 하루만 보고 자이푸르라는 도시로 가는 것이 목적이긴 했다. 결국 그냥 앉아있으면 아그라만 건너뛰고 우리 계획이 하루 앞당겨진 채 진행되긴 했다. 하지만 뭔가 여행 중에는 당연히 미리 세워둔 계획대로만 움직여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것이 있다. 델리에서 타지마할까지 가까우니 못 본 타지마할은 델리에서 하루 시간을 내서 비행기 떠나기 전에 보고 와도 상관은 없다. 오히려 갑자기 모르는 도시에 내렸던 것이 더 위험했을 수도 있다. 여행에선 당최 갑작스러운 일이 일어나면 정신을 못 차리니 원. 


태어나서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도시인 아치네라에 내린 우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진짜 아무것도 없다. 어디선 대절한 듯한 버스로 수많은 관광객들이 타러 들어갔다. 이미 이 정보를 알고 있던 사람들인가. 달려가서 아그라로 간다면 우리도 태워달라고 하고 싶었다. 마음속으로는 그냥 부럽다는 듯이 쳐다만 봤다. 멀뚱히 서 있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버스는 금방 문을 닫고, 떠나버렸다. 우버도 잡히지 않고, 택시도 없는 진짜 말 그대로 깡촌이었다. 내렸던 사람들은 미리 방법을 구해두었는지 다들 떠나버리고 휑한 역엔 낯선 동양인 두 명만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한 릭샤 기사가 800루피에 타지마할까지 가 준다고 했다. 처음에는 택시인 줄 알고 바로 오케이를 외쳤다. 다른 때였으면 흥정부터 시작하지만, 지금은 아무런 방법도 없으니 이거 놓치면 죽는다는 생각에 바로 수락했다. 



춥고 좁고 문도 달리지 않은 오토 릭샤를 타고 인도의 시골길을 달리는 건 또 색다른 기분이었다. 그런데 익숙하다. 화천에서 군용 트럭 뒤에 타고 훈련 가는 느낌이구나. 매캐한 매연의 냄새와 옷 속으로 파고드는 바람의 느낌, 완벽히 그 기분이다. 40분 정도 달려가니 낯선 곳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고 기사는 우리 보고 내리라고 했다. 낯선 곳에서 차를 타고 도착한 더 낯선 장소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둘러싼 기분. 딱 영화에서 많이 본 장면이었다. 여기서 돈만 주고 나가면 다행인 상황이다.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고 들고 있던 배낭으로 최대한 몸을 가리고 멀뚱 거리며 쳐다봤다. 그러자 기사는 내려서 다른 릭샤로 갈아타고 했다. 그리고는 돈 달라고 말을 했다. 이왕 죽을 수 있는 거 할 말은 해야 된다고 생각해 이미 800루피에 타지마할까지라고 했으면서 왜 돈을 또 받냐고 따졌다. 아니 따지다기보다는 정중하게 물어보았다. 그런데 운전하던 친구가 웃으면서 일단 우리에게 800루피를 받아가더니 자기가 직접 갈아타야 하는 릭샤 주인에게 돈을 주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말은 통하지 않지만 ‘자 이 돈에 거기까지 가는 비용 포함이니까 걱정하지 말고 갈아타렴’이라는 듯해 보였다. 갈아탄 릭샤도 같은 오토릭샤인데 운전수에게 휴대폰이 있고 내비게이션을 찍고 갔다. 아마 도시 내부로 들어가는 릭샤는 다른 종류 거나, 혹은 장거리를 왔기에 릭샤를 바꿔 타야 했기 때문인 듯했다.



갈아타고 조금 더 달리니 아그라 시내로 들어올 수 있었다. 확실히 바라나시보다 차도, 사람도, 동물도 적다. 조금 더 읍내 같은 기분이다. 한 시간을 겨우 달려 숙소에 도착했는데 위치도 좋고, 깔끔하고, 무엇보다 안전해 보여서 좋다. 조금 춥긴 하다. 인도는 겨울의 추위보다 여름의 더위에 더 익숙하기에 모든 집이 시원함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바람도 잘 통하고. 타지마할이 일몰 때까지만 문을 연다고 하길래 시간이 없어서 짐만 숙소에 두고 바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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