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졸도 병졸처럼 검은색 벙거지(전립)를 썼다. 신분은 군인이고 소속도 병부였다.
발졸 영감은 형주에게 이런 말을 하고는 했다.
“우리 신분은 군인이지만 누군가와 싸웠던 적은 한 번도 없지. 그러나 정해진 시간을 맞추기 위해 달리다 보면 꼭 누군가와 싸우는 기분이야”
발졸 영감은 자신의 신분을 자랑스럽게도 부끄럽게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타고난 운명이 달리는 것으로 생각하는 듯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했다.
"밤에 북극성을 따라 걸어가면 마음이 편해지듯이, 지금 내 운명을 따른다고 생각하니 힘든 것도 별로 못 느끼겠더라고”
“군인이 훈련을 해야 하듯, 우리도 훈련을 해야 하겠지”
발졸 영감은 처음에 형주에게 기본적인 사항을 가르쳤다.
행낭을 싸고 흔들리지 않게 몸에 묶는 법, 짚신이나 미투리를 벗겨지지 않게 끈으로 고정시키는 법, 창을 사용하는 법, 횃불을 들고 달리는 법 등.
형주에게 달리기 훈련이 필요함을 느꼈다. 평지에서는 곧잘 뛰는데 험한 길에서는 왠지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땅은 대부분 산과 계곡, 바위로 이루어져 있어 험한 길을 달리는 능력이 필요했다. 발졸 영감은 종종 형주를 가까운 계곡에 데려가 자신이 오랫동안 개발한 비기(秘技) 훈련을 시켰다.
“계곡의 흐르는 물을 이기며 달음질하는 훈련이다.” 발졸 영감은 형주에게 행낭을 두 손으로 머리 위로 올리고 물살이 세게 흐르는 계곡을 따라 상류 끝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훈련을 시켰다. 하류에서는 가슴까지 물이 올라왔고, 올라갈수록 센 물살이 다리를 흔들어 댔다.
물살을 떠밀려 내려가지 않기 위해서는 상체가 앞으로 기울이면서 장딴지를 힘 있게 밀어야 했고, 몸이 흔들리지 않게 발목으로 중심을 잡아야 했다.
계곡의 상류에 오르면 커다란 폭포가 있었다. 쏟아지는 물줄기는 썩은 도토리 찌꺼기가 배어 검은빛을 띠었고, 그 아래에는 깊은 소(沼)가 자리 잡았다. 가장자리는 짙은 검녹색이었지만, 중심부는 빛조차 집어삼키는 듯하였다.
발졸 영감은 형주에게 커다란 돌을 집어 들게 한 뒤, 소의 바닥까지 내려가 숨을 참을 수 없을 때까지 있어보라 했다. 형주는 숨을 몇 번 들이쉬고 쑤욱 빠지듯 아래로 내려갔다. 내려가는 길이 끝이 없었다. 어른 키의 세배나 되는 깊이인 듯하였다. 머리에 통증이 왔다. 그보다도 공포가 온몸을 덮쳤다. 결국 바닥에 발이 닿자마자 돌을 내던지고 수면 위로 솟구쳤다. 헐떡이는 형주를 보며 발졸 영감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자네 숨이 차면 왜 달리지 못하는지 아니? 쓰러질까 두려워서 그런 거야. 공포심을 이기고 숨을 다스려 보게”
계곡 주변에는 비스듬히 누운 채 표면이 반질거리는 바위들이 널려 있었다. 짚신 대신 미투리 신발로 갈아 신게 한 뒤 바위를 걸어 올라가도록 하였다. 손을 짚어서는 안 되니 몸의 중심을 잡으며 올라가야 했는데, 바위가 미끄러워 몇 걸음 못 가 미끄러지기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발졸 영감은 화를 냈다. “엉덩이 빼지 말고 발가락 끝에 무게 중심을 실어야지”라며 소리쳤다.
어느덧 미끄러운 바위를 뛰어서 오를 수준이 되었지만, 형주는 조금 짜증이 나서 물어보았다.
“그런데 왜 미끄런 바위로 뛰어 올라가는 연습을 하는 거예요? 좋은 길 많은데”
“호랑이한테 도망갈 때 바위로 뛰어 올라가는 게 최고니까.”
“…”
발졸 영감과 형주는 교대로 근무를 하였는데, 대관령과 삽당령 방향만은 둘이서 같이 달렸다. 다른 방향의 참은 해안이나 마을 전답을 지나가는 곳인데 이곳은 호랑이가 나타날 수 있는 산길이기 때문이었다. 이 길에서는 창을 들고 다녔다. 군졸이 쓰는 창 보다는 짧았다.
형주가 물었다.
“호랑이랑 싸우는 훈련은 왜 안 해요?”
“필요 없다.”
“그럼, 두 명이 같이 다니면 호랑이를 대적할 수 있는 건가요?”
“호랑이랑 맞붙으려고 두 명이 같이 다니는 것으로 생각하는 거냐?”
“…?”
“한 명만 호랑이 먹이가 되면 다른 한 명은 도망갈 수 있어서지.”
“…”
“농담 같냐?”
“예”
발졸 영감은 초년병 시절 같이 일했던 선배이야기를 꺼냈다.
도호부 인근 참에서 보발을 시작한 지 두 달여가 지났을 무렵, 강릉 도호부는 동해 해안가에 왜구들이 숨어 마을을 습격할 준비를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비가 쏟아지는 날이라 봉수대마저 쓸모가 없어, 보발을 통해 수군 진영이 있는 삼척 정라진에 지원요청을 해야만 했다. 이미 날은 어두워지고 있었지만 횃불 하나 없이 자그마한 산고개를 달렸다. 한참을 달리는데 돌연 숲 속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호랑이였던 거군요”
“그래 나무 뒤에서 번뜩이는 것이 호랑이 눈빛이었지. 배가 고팠는지 우리를 공격할 자세였어.”
발졸 영감은 창을 꺼내 들어 선배와 함께 호랑이와 맞붙을 생각을 했다.
“호랑이는 이까짓 창으로 한 두 번 찌른다고 죽지 않아.”
선배는 창을 빼앗더니 행낭을 넘겨주었다.
“내가 호랑이에게 뛰어들 때 빨리 도망가. 자네는 행낭을 전해야지.”
발졸 영감은 깜짝 놀랐다. 선배는 눈을 부릅떴다.
“행낭을 빨리 전달 못하면 우리 마을이 왜구들 노략질로 불바다가 될 거다.”
선배는 빨리 가라고 발졸 영감의 어깨를 밀더니 창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는 호랑이가 몸을 웅크리고 공격할 자세를 취하는 순간 먼저 창을 들고 뛰어들었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발졸 영감은 연신 콧물을 닦았다.
“선배 덕분에 왜구들이 마을을 덮치기 전, 수군이 제때 도착해 그놈들을 소탕할 수 있었지.”
발졸 영감이 산길에서만은 행낭을 형주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창을 쥐고 달리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영감의 말이 떠올랐다.
“병졸들은 화살을 맞아 죽지만, 우리는 달리다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