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방이 역참 본채에서 업무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허겁지겁 졸장이 달려왔다.
“나리, 암행어사 출두입니다.”
졸장은 암행어사가 마패를 보이며 들이닥치니 놀란 것 같았다.
암행어사가 지역에 들어서면 그 지역의 역참을 먼저 들르는 경우가 많았다. 말과 역졸이 필요해서 들를 수도 있지만 역참의 운영상태를 감찰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역참에 문제가 생기면 국가의 통신 시스템이 붕괴되는 것이기 때문에 엄격한 관리의 대상이 되었다.
찰방은 암행어사가 출두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도 천천히 문밖으로 나갔다. 밖에는 어사를 수행하던 사령이 말을 옮기고 있었다. 찰방과 암행어사의 눈이 마주쳤다.
“어인 일로 불시에 출두를 하셨나?”
“자네 잡을 일 찾으려면 불시에 쳐들어와야겠지?”
찰방은 웃으며 어사의 소매를 잡고 본채로 안내하였다. 김헌남, 그는 영동 지방을 관리하게 된 신임 찰방이었다.
찰방은 과거급제를 한지 얼마 안 된 젊고 유능한 문신 혹은 무신을 선정해서 보냈다. 국가의 통신, 물류를 관장하는 임무라 여기서 제대로 능력을 보이면 지방이나 중앙의 요직으로 승진이 보장되었다.
그러다 보니 자존심이 강했다. 암행어사가 역참에 오면 찰방이 응대를 하였는데 서로 품계가 비슷할 때가 많았다. 그래서인지 가끔 기싸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역참에서 암행어사에게 가장 큰 지원이 말 보다도 역졸이었다. 특히 암행어사 출두를 해야할 경우 더욱 그러하였다. 가끔 찰방이 역졸이 외부에 파견되어 지원이 어렵다는 등의 이유로 어사에게 비협조적인 경우가 있었다. 서로의 정치적 배경이 다르거나 감찰을 받아 갈등이 쌓인 경우일 것이다.
그러나 오늘 방문한 어사와 찰방은 절친한 친구 관계였다. 어사는 문과 출신이고 찰방은 무과 출신이기는 하지만 같은 해에 과거급제를 하여 누구보다도 친한 사이가 되었다.
찰방은 어릴 때부터 글공부보다는 뛰어다니기를 좋아했다. 친구들이 본격적으로 과거 시험 준비를 할 무렵 그는 아버지께 무과로 가고 싶다고 고백했다. 당시 찰방의 고향인 삼남지방에서는 양반의 무과 지원이 드물지 않아 어려움 없이 승낙을 받을 수 있었다. 집이 부유해서 활쏘기, 격구 등을 전문가에게 교육받고 과거 시험에 무난히 합격하였다.
어사와 찰방, 그들은 술상을 앞에 놓고 저녁 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갑자기 어사가 여자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노리는 여자가 생겼거든” 어사가 먼저 말을 꺼내었다.
“내가 이쪽 지역을 다니다가 강릉 구산마을 진사 딸이 예쁘다는 소문을 들었네 ”
“자네 어사일이 주로 그런 건가 보지?”
“내가 젊으니까 그런 거지 뭐… 하여튼 그래서 언제 청혼을 하고 싶은데 혹시 자네가 중신 좀 서면 안될까?”
“하... 나를 중매쟁이로 만들어?”
“대신 내가 한양 돌아가면 거기서 좋은 처녀 물색해 둠세. 조만간 자네도 중앙으로 영전할 거 아닌가?”
술자리가 끝나고 아침에 타지로 가는 어사에게 말 두필을 건네주라고 졸장에게 지시를 하였다. 어사가 떠나는 뒷모습을 보고 나서 찰방은 한숨을 푹 쉬었다. ‘후유... 저놈도 진사 딸이구먼’
찰방은 강릉 진사딸의 얼굴을 떠 올렸다.
찰방은 횡계 지방에 근무하게 되었으나 관사가 없어 숙식을 횡계 영감의 사랑방에서 하고 있었다.
두어 달 전 평상시처럼 업무를 마치고 횡계 영감댁 돌아왔다. 그날은 대청마루에서 횡계 부인이 손님으로 찾아온 부인과 수다를 떨고 있었고, 딸인 듯한 여인네가 마당에 심어진 꽃을 구경하고 있었다. 찰방은 대청마루 쪽으로 걸으면서 그녀를 보았다. 정원에 심긴 꽃처럼 화사한 볼에서 향기마저 날 것 같았다. 딸은 갑자기 나타난 남자를 처다 보더니 부끄러운 듯 얼굴을 숙였다.
찰방이 부인에게 업무를 끝내고 돌아왔다고 인사를 하자, 그녀는 손님과 인사를 시켜 주었다. 딸도 불러 찰방에게 인사를 나누게 했다. 사내는 고개를 숙이면서 딸의 꽃신을 보았다. 찰방은 딸에게 말했다.
“꽃신이 아름답습니다. 정원의 꽃보다도 더 아름다운 듯합니다.”
딸이 수줍어 치마로 꽃신을 덮으려 하였다. 그러나 덮어지지 않았다.
횡계 부인은 찰방을 옆자리에 앉으라 하고는 차를 권하였다. 손님으로 온 부인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녀는 강릉 구산에 사는 진사집 부인인데 지금 친정집 가는 길이고 한동안 친정에 머무르면서 딸 혼처나 찾아본다는 등…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찰방은 조용히 이야기를 듣는 중에도 대청마루 끝머리에 앉아있는 딸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찰방의 마음은 매일같이 심란했다. 진사 딸의 얼굴이 수시로 떠올랐고, 혹시 중신이 들어와서 시집을 가버리지 않을까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업무지로 가고 있는데 발졸이 달려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오는 방향을 보면 구산 참이었다. 그들이라면 강릉 진사 딸의 소식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역참만큼 지역 정보가 많이 모이는 곳은 없었다. 그런데 공무를 보는 그들을 불러 사사로이 여인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마음 내키지 않았다. 그냥 기다리고 있다가 그들이 돌아갈 때 감찰을 하는 척하면서 그녀의 소식을 물어보기로 했다. 한참을 기다리니 둘이 나타났는데 갑자기 젊은 발졸이 혼자 자신이 서있는 방향으로 걸어오는 것이었다. 찰방은 그를 막아섰다.
그런데 그가 꽃신 한 짝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절대 잊을 수 없는, 바로 진사 딸의 꽃신이었다.
얼굴 표정을 어렵게 감추고 꽃신을 살펴보았다. 신발안에는 ‘사념(思念)’'이란 글이 쓰여 있었다. '당신을 생각한다'라는 의미였다.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그녀도 찰방을 그리워함을 알았다.
찰방은 발졸 영감과 내리막 달리기 대회를 마치고 구산 참에 와서 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래서 그녀를 보기 위해 이곳에 달려오려 하였지요. 영감님이랑 뛰어오면 금방이 아니겠어?”
“아니 그런 이유로 날 이 고생시킨 거요? 아이고.”
형주가 생각난 듯 물었다.
“그럼 우리에게 무엇을 요청할 생각이었어요?”
“이번엔 나를 위하여 진사 딸에게 급하게 소식을 전달해 주게.”
“뭐요. 찰방 앞에서 죄를 또 지으라는 거요?”
“아니, 말로 전달해 주게. 서신이나 물건을 전달하는 것이 처벌받는 것이지 말로 전달하는 것은 처벌받지 않네.”
“무슨 말인지 알려 주시오. 내가 직접 전하는 것은 아니고 영감 딸을 통해서 전할 것이요.”
“내가 여기와 있다고. 참 앞에서 얼굴 보고 싶다고…”
발졸 영감이 형주에게 말했다.
“어이구. 자네 빨리 서둘러야겠구먼. 찰방 나으리가 몸이 달은 것 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