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보부상의 방문

by 심준일

형주의 달리기 실력도 이젠 발졸 영감 못지않았다. 평탄한 길에서는 발졸 영감을 능가하였다. 잘생긴 총각인지라 그가 뛰어가기만 하면 처녀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까르르 웃어댔다. 그뿐만이 아니라 구산 참까지 찾아와 담너머로 형주를 구경하러 온 처녀들도 제법 있었다. 그래서일까? 산이도 언제부터인지 고양이 집나갈 것을 걱정하듯 형주 옆을 지켜섰다.

“이 동네 기지배들 무섭다. 혼자 다니면 위험해요.”

형주가 동네 처녀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면 이것저것 트집을 잡아 형주를 꼬집어 댔다. 산이가 꼬집는 것이 시늉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매워 형주는 동네 처녀와 마주하다가도 산이가 오면 무조건 도망가야 했다.

형주는 어느덧 자신이 먼 미래의 세계에서 왔다는 것도 잊어가는 것 같았다. 산이와 어릴 때부터 강릉 구산에서 같이 자라온 듯 느껴졌다.

사이좋은 두 사람을 바라보는 발졸 영감은 왠지 한숨이 나왔다. 지금은 나라에서 지급해 준 발전(撥田)을 경작하며 굶지 않고 살 수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나이가 들고 힘이 빠질 때가 문제였다. 보발일을 못하게 되면 발전을 나라에 돌려주어야 했다. 보발일을 물려줄 수 있는 아들조차 없으니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다.


발졸들이 봉양할 자식 없이 나이가 들거나 병이 들어 일을 못한다는 것은 생존의 문제였다.

하루는 어린 소년이 삼척에서부터 정동진 참까지 달려와서는 문턱에서 행낭을 넘겨주고 그대로 쓰러졌던 일이 발생하였다. 아버지가 병이 들어 일을 못하자 소년이 대신 달려온 것이다. 참의 발졸들은 이 사실이 알려질까 봐 쉬쉬 해야만 했다.


형주가 산이를 데리고 산다면 나이 들어 그에게 의탁하면 되었다. 그러나 형주에게 지급된 발전만 갖고 세 명이 사는 것은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래서 발졸 영감은 나이가 들면 집은 산이에게 내주고 산골짜기 마을로 들어가 화전을 경작하거나 약초 채취를 할 생각을 가졌다. 그렇지만 산이가 이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러던 어느 날 역참에 보부상 몇 명이 찾아왔다. 역참에 보부상들이 들리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들 우두머리가 인사를 하며 발졸 영감과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다.

발졸 영감은 보부상을 안채로 안내하였다. 형주도 들어오자 보부상은 먼저 인사를 건넸다.

“함길도(함경도)에서 온 접장 최기열이라 합니다.”

발졸 영감은 깜짝 놀랐다. 접장이라 함은 한 지역 보부상 조직의 우두머리였다.


특히 함길도 보부상조직은 전국에서 알아주는 큰 규모였다.

북방지역에 생필품이나 군수품을 조달할 뿐만 아니라 야인(여진)으로부터 담비 가죽, 산삼을 매입하여 왕실에 까지 공급하고 있었다. 전국망을 가진 개성 상인도 북방지역의 거래는 이들을 통하여야 했다.

이러한 기반은 함길도 출신인 이성계와의 관계 때문이었다. 이성계가 전장을 누빌 때 함길도 보부상은 군량미와 무기를 지원하였고, 그들의 조직을 이용하여 중요한 정보를 수집하고 제공하였다. 게다가 이성계가 전쟁터에서 부상을 입었을 때 목숨을 구해준 것도 함길도 보부상이었다.

때문에 함길도 보부상의 접장이면 웬만한 벼슬아치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였다.


“아이고 이렇게 높은 분이 여기에 웬일입니까?”

“높은 분이라뇨? 저 같은 장사치가 무슨…”

“저는 여기 참에서 일하고 있는데 나이가 들었는지 다들 저를 발졸 영감이라고 합니다.”

“나이가 아니라 조선 최고의 발졸이시니 존중의 의미로 영감이라 하겠지요.”

발졸 영감은 형주에게도 인사하라고 손짓을 하였다.

“저는 몇 달 전부터 보발일을 하게 된 신참 발졸입니다.”

형주는 무릎을 꿇고 넙죽 절을 하였다.

“젊은 발졸 총각 만나서 반갑네. 소문에 영감님과 겨룰 정도로 달음질 실력이 출중하다 들었네.”

“하하 뭐 소문까지….”

형주는 머리를 긁으며 멋쩍게 웃었다. 그런데 갑자기 접장이 형주의 왼쪽 손을 잡았다.

“오, 문양이 멋진 반지를 끼고 있구려. 이런 귀한 금반지를 어디서 구했을까?”

“헤헤. 아버지한테 물려받은 거예요. 아버지한테는 할아버지가 전쟁터 가면서 주신 거 고요.”


형주의 대답에 무슨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접장은 발졸 영감에게 몸을 돌려 찾아온 용건을 말했다.

발졸 영감이 놀라 소리쳤다.

“뭐어, 달음질 경주를 하자는 거요?”

“그렇습니다. 강릉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해서 왕복 삼백 리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삼백 리?... 삼백 리요? 누가 강릉까지 와서 그 먼 거리를 뛴다고 합니까?”

“제가 보부상 조직을 통해서 물색한 후보자들이 몇 있습니다. 물론 이런 엄청난 경주에 참가시키려면 그만큼 큰 상금도 필요하겠죠.”

“어느 정도 상금입니까?”

“허허 영감님께 먼저 말씀드릴까요? 장원자는 금 세 냥으로 하고, 나머지는 완주만 하면 금 한 냥씩 포상할 생각입니다.”

상금의 크기에 발졸 영감이 깜짝 놀랐다.

“장원자가 금 세 냥이라고요?”

금 한 냥만 해도 초가 한채 혹은 소 두 마리 정도는 살 수 있었다. 한해를 농사지어도 얻을 수 없을 정도로 큰 재물인 것이다.

“그렇습니다. 놀라셨나요?”

“큰 보부상 접장이라더니 이렇게 큰 재물을…”

“재물은 많이 모았습니다만 모두 제 재산으로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도와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어떤 분이요?”

“으흠, 지금은 말씀드릴 수 없고요. 어쨌든 삼백리를 뛸 만한 충분한 보상은 되겠지요. 꼴찌를 해도 완주만 하면 소 한 마리는 챙기는 것이니….”


발졸 영감은 접장의 얘기를 듣고는 한숨을 쉬었다.

“다 좋은데… 우리야 관아에 소속된 몸이니 함부로 처신힐 수 없는 일임은 알고 있을 것 아니오. 내가 좋다 싫다 하기 전에 먼저 찰방과 강릉 부사를 만나 이야기해 보시구려.

“당연한 말씀입니다. 찰방과는 이미 의논을 하였고 곧 부사를 만나 협조를 요청드릴 생각입니다.”

“부사께서 승낙할 것 같지는 않소”

“허허 그런가요? 만약 승낙을 하면 영감님이 뛰시겠오 아니면 저 젊은이를 뛰게 하겠오? 두 명은 안되고.”

발졸 영감은 잠시 생각하더니, 형주를 뛰게 하겠다고 하였다.

형주는 옆에서 이야기를 듣다가 깜짝 놀랐다. 접장은 고개를 끄떡였다.

“젊은 발졸의 기량이 영감 못지않다고 들었습니다.”

접장은 형주를 보면서 웃어 보였다.

“영감님이 자네에게 양보하는군. 장가라도 가야 할 텐데 그 금반지 하나 가지고 되겠나?”

화, 수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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