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은 구산 참 마당이 잘 보이는 작은 동산에 앉았다. 산이는 가져온 무 껍질을 벗겨 형주에게 주었다. 한 입 베어 먹은 형주의 입에 무의 알싸한 맛이 스몄다. 산이는 형주를 몇 번 쳐다보면서 ‘아무리 봐도 형주가 찰방보다 더 잘 생겼네’라고 생각하였다. 무가 평소보다 더 달고 시원한 듯하였다.
“너는 기억을 다 잃었다면서? 진짜 너가 누군지 몰라?”
“아 몰라. 갈수록 나는 원래 이 세상에 살았던 것 같기도 하고, 미래의 세계는 생각나다가도 점점 흐릿해져. 내가 미친 것 같기도 해”
“알겠다. 말하는 것 보니 많이 미친 것 같지는 않고 금방 좋아질 것 같아.”
“요즘 진사 딸 연애한다며?”
“딱 보니까 금방 시집가겠더라. 아기씨는 부모님이 모른다고 생각하는데, 행랑어멈 얘기 들어 보니까 다 알고 있더라.”
“넌 언제 시집가나?”
“피, 나 같은 다리병신을 누가 데려가겠다고 하겠니?”
형주는 산이는 굽은 오른쪽 다리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발도 쳐다보았다. 실업팀에서 방출된 마라토너의 발. 멀쩡해 보이긴 했지만 망가진 발이나 마찬가지였다. 형주는 비참하다 생각했었지만 산이는 그러지 않는 것 같았다. 바람을 맞이하는 들판의 들꽃처럼 얼굴은 활짝 피었다.
“저 앞에 산 있지?”
산이가 손가락질하였다.
“산 중턱에 가면 앵도나무가 지천이래. 엄마가 처녀 때 거기 많이 가봤다는데, 나도 가고 싶어.”
형주는 골똘히 생각했다. 평지도 힘겹게 걷는 산이에게 오르막 산길은 무리였다.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형주는 참으로 뛰어가 지게를 갖고 왔다. 지게에는 잔가지를 싣는 싸리나무 발채가 얹혀 있었다. 작대기로 지게를 세워놓고 산이를 번쩍 안아 발채에 올려놓았다.
“가만히 앉아있어.”
“나 무겁단 말이야.”
“무겁긴. 쪼그만 게. 한 때 바벨 스쿼트 백 킬로도 했구먼”
“?”
형주는 산이를 짊어지고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산이는 허리를 돌려서 지게의 세고자리를 두 손으로 꼭 쥐었다. 위로 올라 갈수록 나뭇잎 밟히는 소리보다 숨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마침내 도착한 산 중턱. 진짜로 빨간 열매를 단 산앵도나무가 지천이었다. 형주는 내친김에 산이를 짊어지고 엄마의 무덤으로 데려갔다. 산이는 앵도 한 줌을 엄마의 초록빛 가슴 앞에 내려놓았다. 형주에게 입을 아하고 벌리라 하고는 앵도 하나를 쏙 넣어 주었다. 무덤에 잠든 엄마에게 자랑하는 듯.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왔다. 하천이 예전보다 일찍 얼었다. 겨울에도 추위를 모르고 살던 형주는 조선의 겨울이 너무 힘들었다. 그나마 산이가 옆에 있어 덜 추웠다.
산이는 눈만 쌓이면 구산참에 달려와 형주에게 눈덩이를 던지며 장난을 쳤다. 부엌에 숨어 있다가도 나타나 던지고 장독대에 숨어 있다 가도 나타나 눈을 던졌다. 그러다 손이 얼면 그를 붙잡아 부엌에 데려갔다. 아궁이에는 밥을 하고 난 뒤에도 잔불이 남아 있었다. 산이는 형주옆에 앉아 불을 쬐었다. 그럴 때는 다소곳했다.
산이는 참이나 진사 댁에 일을 하러 오갈 때 함지박이나 광주리를 이고 다녔는데 천으로 둘둘 싸긴 했어도 손을 많이 시렸워했다. 형주를 보면 달려들어 손을 그의 등짝에다 집어넣었다. 어떤 때는 엉덩이에 넣으려 하기에 도망친 적도 있었다.
나라에서는 발졸들에게도 솜저고리를 지급하였다. 고려말에 들어온 목화가 아직은 귀하다 보니 북방을 지키는 병사와 함께 주어지던 특전이었다. 어느 날 형주는 솜저고리의 한쪽을 뜯었다. 거기서 솜뭉치를 끄집어내었다. 그리고 앵도물들인 무명천을 자른 뒤 솜뭉치를 넣어 벙어리장갑을 만들었다. 산이가 밥 하러 와서 파랗게 된 손을 들며 형주에게 달려들 때 산이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준비해 둔 장갑을 끼워 주었다. 장갑은 사랑채 윗목에 데워놓아서 아주 따듯하였다.
“예쁜 손싸개네”
산이는 너무 좋아 깡충깡충 뛰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니 날씨가 나른 나른하였다. 춘궁기이긴 하지만 발졸들에게는 둔전이 있고 미숫가루와 같은 비상식량도 지급되어 큰 어려움이 없이 지낼 수 있었다. 산이도 진사 댁에서 일을 거들며 먹을 것을 얻어오고는 했다.
구산 참에서 쥐를 잡으라고 키우는 고양이 ‘나비’가 있었다. 잠잘 때 부엌 아궁이 근처를 차지하고 있어서 털에는 연기 냄새가 은은하게 배었다. 산이가 부엌에 들어오면 눈만 가늘게 뜨고 지켜만 보았다. 밥 뜸을 들이고 나서 산이는 나비를 잡아 안고 형주에게로 갔다. 형주와 나란히 마루에 앉은 산이는 봄 햇살을 쬐며 나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고양이가 갸르르 하였다.
“나비는 나중에 우리가 데려가서 키울까?”
산이는 먼 산을 보며 지나가듯 말했고, 형주는 그냥 생각 없이 ‘응’하였다.
그런데 형주의 뭐에 삐졌는지 산이는 흥하며 고양이를 안고 부엌으로 가 버렸다. 부엌 한 구석 땔감무더기에서 나무쪼가리 하나를 집어 아궁이에 휙 집어던지며 산이는 화풀이를 하였다.
“저 머리 나쁜 것이 무슨 뜻인지나 아나, 뭐.”
여름도 왔다. 무더웠다. 사랑방 문을 활짝 열어 놓고 바닥에 시체처럼 누워 있는데 산이가 엉엉 우는 소리가 들렸다. 몸을 일으켜 보니 산이는 어디서 넘어졌는지 얼굴과 몸에 흙먼지를 잔뜩 묻혔다. 발졸 영감이 뛰쳐나와 딸의 옷을 털어 주었다.
“아이고 이것이 어디서 넘어졌구먼. 조심해서 다니지 않구”
“진사댁에 얼음이 들어왔길래 아기씨한테 떼를 써서 한 덩어리 얻어 오는 길이라고요. 근데 얼음이 너무 빨리 녹는 거 같아 빨리 걷다가 넘어졌어요.”
산이가 내민 광주리에는 젖은 짚 속에 작은 얼음 덩어리가 하나 있었다.
“이놈아. 아비 때문에 다리가 성하지도 않은 게 뛰려고 했어?”
“아니요. 형주 주려고요.”
“…”
산이는 짚을 헤집어 엄지 손가락만 하게 남은 얼음덩이를 쥐고는 형주에게 절뚝거리며 다가갔다. 그에게 ‘아’하라고 하더니 입에 넣어주었다. 형주는 입이 시려 뱉고 싶었지만 참아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