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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윤선 Oct 03. 2023

바나나 잎의 쓸모

초록 속에서 또 초록을 만나는 일

  호텔 내 좁은 길을 따라 저녁 산책을 나설 때였다. 한 청년이 내 길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옆으로 비켜서는 게 보였다. 나는 한쪽 팔로 바구니를 들어 옆에 낀 채 바나나 잎을 만지고 있는 청년의 곁을 그저 조용히 지나쳐 갔다. 그 와중에 슬쩍 바구니 안을 보니 바나나 잎이 들어있었다. 호텔 직원임이 분명했을 그는 아마도 호텔에서 쓸 바나나 잎을 채취하는 중이었나 보다. 마치 바나나잎에게 말이라도 거는 것처럼 그의 손짓은 조심스러웠다. 적어도 내 눈엔 그렇게 보였다. 고마워하면서, 미안해하면서 최대한 아프지 않게 사용할 만큼만 적당한 양의 바나나 잎을 잘라내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걸리지 않아 알게 되었다. 발리인 들은 바나나 잎을 여러 용도로 사용한다는 것을.  때로는 희고 노란 재스민 꽃과 함께 식탁용 장식으로도, 접시 위에 깔아 그릇으로도 사용한다. 매일 아침 신께 드리는 공물을 담는 접시로도, 일터로 나가는 현지인들이 사 먹는 도시락용으로도 쓰인다. 청결과 편리함을 핑계로 일회용품이 넘쳐나던 내가 떠나온 도시와는 딴판의 모습이었다. 


  내가 들린 우붓의 비건식당에서의 상차림에서도 바나나 잎은 꽤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다. 초록 바나나 잎에 담겨있던 인도네시아식 볶음밥인 나시고랭은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돈다. 과일 주스를 담아주던 유리컵 한 귀퉁이에도 바나나 잎사귀를 새의 부리처럼 오려 장식하곤 했다.  자잘한 흰 꽃과 바나나잎이 장식되어 나오는 샐러드나 과일은 먹기 전부터 시각을 행복하게 해주곤 했다. 조화롭고도 자연스러운 장식이었다.

 

  내 여행 스타일은 그러려면 왜 떠나왔나 싶을 정도로 뭘 하지 않으려는 쪽에 가까운 편이다. 어찌 보면 집을  떠나온 곳에서 집처럼 생활하고 싶어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시간에 쫓길 만큼 빡빡하게 짜는 관광형 여행 스타일은 나와 맞지를 않는다. 먹고 산책하며 둘러보고 머물러보는 것. 어슬렁거리며 낯선 곳의 공기를 느껴보는 것. 이것이 내가 좋아하는 여행 스타일이다. 그런 내게 이곳 우붓은 나를 위한 맞춤여행 지였다고나 할까. 물론 혼자 왔기에 가능했겠지만 말이다. 


  바나나 잎 장식과 함께 나오던 우붓에서의 비건 식사를 잊는다는 건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가끔씩 떠올려보면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몽키 포레스트 가기 전에 있던 비건 식당 앞에는 옹기종기 작은 꽃들을 심어놓은 화분이 있었고 나는 때마침 발코니에 나와있던 소녀와 눈이 마주쳤었다. 식당의 가장 높은 선반의 구석에는 신전이 차려져 있었는데 신을 기리며 장식해 놓은 소박한 장식이 아기자기했다.  


  아침에 눈뜨면 제일 먼저 신을 향한 기도를 떠올리는 사람들. 9시에 시작되는 '요가반' 요가클래스에 맞춰 길을 나서면 이미 신께 바치는 성물이 놓여있던 '하누만 로드'였다. 지구 어머니를  귀하게 여기는 현지 사람들의 생활방식이었다. 그런 이들의 손에서 만들어진 비건 음식들을 먹고 나면 저절로 마음이 순해질 것 만 같았다. 


자주 가던 비건식당 내부 오른쪽 모서리에 모셔진 신전 


바나나 잎 장식 위의 밥, 사진을 찍기도 전에 수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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