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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윤선 Sep 19. 2023

생의 한가운데

어두운 밤이 지나고 난 후 맞이한 파파야주스의 시간

  두 번씩이나 제목에 이끌려 집어든 책이 있다. 루이제 린저의 장편 소설 <생의 한가운데>가 바로 그것이다. 한 권은 예술가 전혜린 번역의 것이고, 한 권은 번역가 박찬일의 것으로 총 두 권을 갖고 있다. 이미 사서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또 같은 제목 앞에서 멈추어 서 홀리듯이 집어 들고 온 기억이 있다. 그렇다고 이 책의 주인공인 '니나'의 불꽃같은 삶에 매혹되었던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별 이유 없이 아니 자신도 모르게 같은 책을 집어 들었던 그때처럼 그 겨울 떠나야 한다면, 우붓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런지 그냥 그러고 싶었다. 그 무렵 '생의 한가운데'에 선 나에게 그 여행은 그렇게 다가왔었다.  


  3일 동안 '아궁라카'에서 머물려던 계획을 바꿔 하루 반 만에 숙소를 옮겼다. 지난한 홀로 여행의 준비 과정 속에서도 뚝딱거리며 들어서는 설렘의 감정은 첫 숙소 '아궁라카'에 대한 기대도 한몫했었다. 정말이지 나름 성실한 웹 파도타기 끝에 찾아낸 곳이었다. 거기선  ‘Yoga Barn Yoga Studio’가 멀지 않은 데다, 우붓에 다녀온 여행자들의 후기에 자주 등장하는 '코코 슈퍼'도 가까웠다. 그뿐인가? 호텔 정문 밖에서 5분 거리에 히피풍의 인터넷 연결이 좋은 ‘스위트 어니언’이란 비건 카페도 있었고, 후문으로 나가면 비건 나시고랭을 주문할 수 있는 식당이 몇 군데 더 있었다.


  그러니까 예상대로라면 나는 긴 비행의 여독을 풀 빌라 옵션의 여기 아궁라카의 따뜻한 욕조에서 풀었어야 했다. 우붓의 꽃인 '참파카꽃 오일'을 욕조에 몇 방울 떨어트려도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완전히 어긋난 꿈. 나를 기다리고 있던 건 칠흑처럼 어두운 정전의 긴 밤이었다. 설상가상 온수도 안 나왔기에 몸서리를 치며 냉수마찰 샤워를  할 수밖에 없었다. 어둠 속에서 촛불을 들고 나타난 호텔직원과 마주할 때의 긴장감이라니. 잠시 혼자 온 여행이 후회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게 어떻게 떠나온 여행인데. 여행지에서의 숙박 사기사건이니 뭐 그런 슬픈 일은 어디서 들어본 얘기에 그쳐야만 했다. 나는 털끝만큼도 내 여행을 망칠 생각이 없었다. 그 와중에 깊은 잠에 빠졌는지 잠을 깨운 건  우렁차게 울리는 개구리들의 합창소리였다. '여기가 정녕 비행시간 8시간 더하기 자동차 2시간 총 10시간을 날아온 우붓인 걸까? 어릴 때 살았던 시골 동네인 건가'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꺾이지 않는 의지는 이 여행은 성공적이어야 한다는 거였다.

논뷰를 보며 걷던 호텔 내 산책 길에 본 우붓의 삼색 고양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어둠이 몰려가고 문 밖에 새벽의 빛이 드리우는 기척이 느껴졌다. 마침내 아침이 밝아온 것이다. 비로소 나를 둘러싼 그 모든 무서운 것들의 실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밤새 나를 해하려고 으르렁대던 바람소리, 거대한 나뭇가지들의 손아귀 같던 그림자, 경사진 돌계단들. 찬찬히 둘러보니 다 아름다운 것들이었다. 나는 결코 사기를 당한 것이 아니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방을 옮기고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조식을 먹으러 논길을 지나 식당으로 갔다. 호텔이 논 가운데 있는 건지, 논이 호텔 건물 사이로 들어온 건지 경계가 모호한 형태의 건물이란 것도 알 게 되었다.  논길을 걸으며 작은 들꽃들과 눈을 마주쳤다. 돌기둥 위를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우붓의 고양이와도 눈인사를 했다.


  비로소 실감이 났다. 비건과 예술인과 요가인들의 천국이라는 여기 우붓의 한가운데 와있다는 사실이. 초록의 논뷰가 아늑했다. 마음 안으로 초록이 몰려드는 것 같았다. 결코 끝나지 않을 것처럼 두렵고 어둡던 밤이었지만 어김없이 아침은 온다는 것. 신선한 파파야 주스 한 잔을 앞에 두고 다가올 삶을 찬미했었다.





우붓에서의 첫 숙소였던 아궁라카 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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