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울증 치료의 골든 타임

조울증과 타이밍

by 폴짝
A stitch in time saves nine.
제 때의 바느질 한 땀이 아홉 번의 바느질을 덜 수 있다.
- 서양 속담


조울증은 관리가 가능하지만, 관리의 난이도는 환자에 따라 크게 다를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조울증이 처음 발병한 초기에 정확한 진단과 적절한 치료를 받게 되면, 향후 약을 먹지 않아도 될 정도로 예후가 좋을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이른바 완치에 근접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반면에 조울증 환자가 여러 번 재발을 반복하고 병을 방치했을 때는 평생 약을 먹게 될 가능성이 커지고, 심지어 치료를 시작한 다음에도 재발할 수 있습니다. 조울증이 최초 발병했을 때를 치료의 ‘골든 타임’으로 보는 중요한 이유입니다.


안타깝게도 저는 골든 타임을 놓친 경우에 해당합니다. 조울증을 처음 진단받고 보니, 그전에 이미 오랫동안 조울증을 앓고 있었고 병이 여러 번 재발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입원해 있는 동안 병력을 묻는 질문을 많이 받고, 스스로 과거를 반복해서 복기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사실입니다. 언제 어떤 사건이 있었나 되짚어 본 결과, 고등학교 초반에 처음으로 발병했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따져보니 첫 발병과 진단 사이에 대략 15년 정도의 시간차가 있었습니다.


사실 조울증이 발병하고 제대로 진단받는 데 걸리는 시간이 평균적으로 10년 정도라고 하니, 제 경우가 특별 케이스인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병에 관해 아무것도 모른 채 흘려보낸 시간을 생각하면 속이 쓰립니다. 지나간 과거를 두고서 만약 이랬다면 혹은 저랬다면 하고 가정해 보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좀 더 일찍 조울증인 것을 알았더라면, 그래서 그 긴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더라면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만약 발병하기 전으로 돌아간다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래서 지금 더 나은 삶을 살고 있었을까요?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그렇지 않았으리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만큼 제가 경험한 조울증은 쉬운 병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놓쳐서는 안 되는 중요한 시점, 골든 타임. 그러나 저는 조울증 치료의 골든 타임을 놓쳐버렸고, 그 결과는 파괴적이었습니다.


조울증 당사자로서 느끼는 이 병의 무서운 점은, 조울증이 한 사람의 정체성을 무너뜨린다는 것입니다. 조증일 때와 우울증일 때 너무나도 다른 자신의 모습을 경험하면서, 어떤 자아가 진짜 자기 모습인지 헷갈리게 되고 서서히 스스로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됩니다. 조증일 때 생각이 엄청나게 빨라지고 많은 일들을 벌이다가(여기에는 수많은 사건 사고가 포함됩니다), 우울증 시기가 되면 에너지가 완전히 방전되어 집 밖에도 나가기 힘들고 심지어 씻지도 못할 정도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렇게 양 극단을 오고 가다 보면, 결국에는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존감도 약해집니다.


다른 한편으로 조울증은 인간관계를 망가뜨립니다. 지인들과 친구들로부터, 최악의 경우 가족과의 관계까지 끊어지게 합니다. 특히 조증 시기에 인간관계를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말과 행동을 많이 하게 되는데, 심하면 폭언과 폭력적인 행동도 하게 됩니다. 심한 조증 상태인 환자는 주변 사람에게 미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실제로 정신적으로 많이 아픈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주변인들은 당사자가 환자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 상태로 환자의 말과 행동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완전히 정나미가 떨어지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조증이 반복될수록 주변 사람들도 하나 둘 떨어져 나가게 되고 나중에는 가족들마저 멀어지는 경우도 흔합니다.


그리고 조울증은 시간과 돈을 먹어치우는 괴물입니다. 조증 시기에 환자는 자신의 판단을 과신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환자는 중요하지 않거나 해로운 일에 에너지를 쏟느라 시간을 낭비하고, 흔히 금전적인 손해를 입게 됩니다. 한 번은 제가 조증이 심했을 때, 외제차를 사고, 수시로 주변 사람들에게 술을 사고, 말이 안 되는 사업을 한다고 대출을 받아 직원을 고용하기도 했습니다. 나중에는 직원 월급 줄 돈이 모자라서 돈을 마련하려고 전전긍긍하다가 대출 사기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지나고 보니 스스로 생각해도 황당했지만, 당시에는 에너지가 넘쳤고 모든 일이 잘 돌아가고 있다고, 이 사업은 꼭 성공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조증이 너무 심하면 종종 이러한 망상 증상까지 나타나기도 합니다.


조울증 환자가 이와 같은 일을 겪지 않으려면, 다시금 강조하지만 치료의 골든 타임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하는 조울증 환자들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저와 같이 초기 진단과 치료에 실패하고 오랫동안 병을 키워 온 경우라면 대안을 찾아야 할 수 있습니다.


많은 환자들이 조울증 완치를 치료 목표로 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한때 그랬습니다. 하지만 지금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조울증 환자가 완치를 기대하는 것은 스스로 희망고문을 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물론 무조건 완치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제 말의 의미는, 그보다는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는 게 어떻겠냐는 것입니다. 조울증이 만성이 되면 평생 약을 먹고 관리해야 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집니다. 그렇기에 먼저 이 사실을 받아들여야 병에 적절한 대응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평생 약을 먹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환자 본인에게나 그 가족들에게나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이런 불편한 진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오히려 장기간 이어지는 치료 과정에 지쳐서 약 먹기를 포기하기도 쉬워집니다.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는 것이고, 현재와 미래를 위해 현실 감각을 끌어올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조울증에 관한 이해하는 접근법의 하나로, 흔히 조울증을 당뇨병에 비교하고는 합니다. 하지만 저의 조울증 경험에 따르면, 이러한 비교는 조울증의 위험성을 과소평가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조울증은 당뇨병이 아니라 오히려 암과 비교하는 것이 적절할 수도 있습니다. 조울증 환자의 높은 자살률(통계적으로 우울증 환자의 자살률보다도 높습니다), 그리고 쉽게 재발하는 병의 특성을 고려하면, 암이라는 병의 성격과 공통점이 많다는 사실이 새삼스럽지 않게 느껴집니다. 조울증에 익숙하지 않은 일반인들이 모르는 사실은, 조울증은 생각보다 죽음과 아주 가까이 있는 병이라는 점입니다. 저만해도 조울증을 겪은 이후 자살 충동을 느낀 적이 몇 번 있었습니다. 다행히도 소심한 성격 덕분에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지만, 최근에도 우울증이 깊어질 때면 ‘죽고 싶다’는 생각이 종종 들곤 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라도 가족들은 조울증 환자를 잘 관찰해야 합니다.


다시 조울증 진단의 골든 타임이라는 주제로 돌아와 봅니다. 사실 조울증을 한 번만에 진단해 낸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기본적으로 모든 조울증 환자가 똑같은 증상을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양한 병들 가운데 조울증을 정확히 짚어내기가 힘듭니다. 그리고 조울증의 첫 증상이 우울증으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도 오진이 일어나기 쉽게 만듭니다. 이것은 전문의들도 많이 실수하는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조울증의 우울증은, 일반적인 우울증과 그 증상이 아주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우울증으로 잘못 진단받은 환자는 우울한 감정을 개선시키는 항우울제를 처방받게 되고, 그래서 의도치 않게 기분이 갑자기 튀어서 조증 증상이 나타나기 쉽습니다. 그제야 주치의는 진단명을 조울증으로 수정하게 됩니다. 현대 정신건강의학이 과거에 비해 많이 발전했지만 여전히 한계가 존재하기에, 아직까지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인 것 같습니다.


조울증 진단이 쉽지 않은 또 다른 이유, 그리고 정신 질환의 진단이 어려운 이유는 진단이 많은 부분 환자의 설명에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신체적인 병을 진단할 때 여러 가지 물리적인 검사 도구가 보조 역할을 하는 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그래서 조울증은 환자와 의사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이 잘 이루어져야 진단과 치료를 제대로 받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조울증 진단을 어렵게 만드는 근본 원인은 조울증과 정신 질환에 관한 사회적인 무지와 편견입니다. 간혹, 조울증을 이미 오랫동안 경험한 제가 보기엔 너무나 명백하게 조울증 환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주변 사람들은 그가 조울증을 앓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병이라는 인식이 없으니 병원에 갈 생각은 할 수가 없고, 그래서 증상이 아주 심각해질 때까지 방치하는 경우가 흔합니다. 때로는 조울증을 알아챘다 해도, 사회적인 낙인이 찍힐까 봐, 병을 인정하기 싫어서 병원에 가지 않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러면 치료는 한도 끝도 없이 미뤄지고, 조울증으로 인한 피해는 환자 본인과 그 가족, 지인들이 온전히 감당해야 합니다. 사실 이 글을 쓰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사람들이 조울증을 더 잘 알게 되고 이해하여, 주변에 비슷한 증상을 보이는 사람이 있을 때 조기에 치료받도록 도울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 기대가 현실로 이루어지기에는 갈 길이 멀어 보입니다.


이와 같은 여러 이유 때문에 조울증 진단과 치료의 골든 타임을 놓치지 않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행히도 첫 발병 때 정확한 진단을 받고, 좋은 의사로부터 적절한 치료를 받아 병을 안정시키는 데 성공했다면, 당신은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만큼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이런 분들은 꾸준히 치료하고 관리한다면 재발 없이 평범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조울증을 방치하다가 뒤늦게라도 치료를 시작한 환자들 역시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타이밍’이 조울증 치료의 다이아몬드라면, ‘꾸준함’은 치료의 황금과도 같습니다. 치료와 관리를 계속하다 보면 언젠가는 조울증과 함께하는 삶도 그리 나쁘지 않구나, 하고 생각하는 때가 오리라고 희망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결코 희망고문이 아니라는 것이 저의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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