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울증과 광기
그래서 나는 지금 딱 미친놈이야.
- <시크릿 가든> 중 현빈의 대사
저에게 2012년 무렵은 극조증으로 얼룩진 최악의 해였습니다. 임의로 약을 끊은 지 1년이 넘어가고 있었고, 거의 제정신이 아닌 듯한 상태였습니다. 그야말로 ‘미친놈’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증상이 심했습니다. 에너지가 끝을 모르고 넘쳤고, 동시에 항상 피곤하기도 했습니다. 넘치는 에너지를 잡아먹는 블랙홀 같은 것이 제 안에 있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충동적으로 애니메이션 관련 사업을 하겠다고 사업자 등록을 내고, 대출을 받은 돈으로 의미 없이 차를 구입했습니다. 중고차였지만 외제차였고 고금리 대출을 끼고 샀기 때문에, 나중에 그 빚을 갚느라 꽤 오랫동안 고생해야 했습니다.
중간에 다른 애니메이션 회사 일을 하다가 동료 직원과의 트러블 때문에 금방 그만두는 일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 저는 마치 싸움닭 같아서, 끊임없이 화를 냈고, 사소한 일에도 분노를 느끼곤 했습니다.
알코올 문제도 심각했습니다. 매일 술을 마셨고, 술버릇도 엉망이었습니다. 법적으로 문제가 될 만한 경계선에 있는 행동들도 종종 했습니다. 그때는 그것이 잘못이라는 인식도 하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술을 거의 마시지 않지만, 당시에는 폭음을 자주 했고 그러면 굉장한 해방감을 느꼈습니다.
이와 같은 심각한 조증 상태는 여러 번 반복되었습니다. 기분이 뜨고 가라앉기를 계속해서 굉장히 힘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약은 여전히 먹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정체성에 대한 혼란도 깊어져 내 진짜 모습이 어떤 것인지 헷갈렸습니다. 도대체 조증과 우울증 양 극단 사이 어디쯤이 나의 자아에 가까운 지점인지 감도 잡지 못했습니다.
심한 조증이 지나가고 나면 깊은 우울증이 찾아왔습니다. 조증 때 있었던 일로 스스로를 비난하면서 집 밖으로 거의 나가지 못하니 사회생활도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자책과 우울감으로 얼룩진 우울기가 지나면 또다시 조증이 나타났습니다.
조증기에는 기분이 들뜨고 굉장히 활동적으로 변합니다. 생각이 빨라지고 그런 생각의 속도를 따라잡으려 말도 덩달아 빨라지게 됩니다. 여러 감정이 극단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데, 저의 경우에는 그 중심에 분노가 있었습니다. 제 개인적인 기준에 비추어 봤을 때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것들, 정의롭지 못하다고 느껴지는 것들이라면 사소한 일에도 극도로 화를 낼 때가 많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가볍게 넘기면 그만이었을 일들을 그때는 왜 그렇게 참지 못했는지 저 스스로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 정도로 분노의 수위가 굉장히 높았습니다.
이처럼 그 무렵 제 모습은 감정의 고양, 분노, 괴로움, 슬픔과 우울 등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었고, 저는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돌아봐도, 그때의 저는 다름 아닌 미친놈 그 자체였습니다.
‘미친놈’이란 말은 대개 욕으로 쓰이지만, 사실 이 말의 본 뜻을 따져 보자면 제정신이 아닌 자, 그래서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즉, 정확히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를 가리키는 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표현하는 말이 그대로 욕으로 쓰인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정신 질환에 대해 얼마나 심한 편견을 가져왔는지를 잘 보여주는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에 비해 정신 질환에 관해 많은 것들이 알려졌고 정신 건강 전문 병원의 문턱이 많이 낮아졌음에도 불구하고, 편견과 낙인은 여전히 널리 퍼져 있습니다.
사람들은 조울증과 같은 정신 질환에 대해 다른 질병보다 특별히 거부감을 가지는 것 같아 보이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는 여기에 ‘두려움’이 깊이 관계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두려움은 ‘무지(無知)’로부터 나온다고 합니다. 우리는 잘 모르는 것들에 대해 두려움을 갖기 쉽습니다. 예를 들어 공포 영화에서 관객의 두려움을 극대화하려면 그 공포의 대상을 한 번에 다 보여주지 않고, 정체를 알 수 없게 직접 보여주지 않습니다. 코로나 19와 같은 전염병이 우리를 두렵게 했던 것도, 그 실체를 정확히 알지 못했던 이유가 큽니다. 또 지금처럼 과학이 발전하기 전 우리 선조들은 자연 현상들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그 원리를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정신 질환에 관한 두려움(혹은 거부감) 역시 무지 탓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에 비해 정신 질환에 관한 상당한 연구와 이해가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들에게 정신병은 여전히 미지의 영역입니다. 잘 모르기 때문에 정신 질환을 두려워하게 되고, 이에 따른 반응으로 거부감, 혐오 감정이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반면에 제 경험상 정신병에 대한 거부감이 가장 적은 집단은 바로 정신 질환 당사자 커뮤니티입니다. 여기에 속한 환자들 및 가족들은 정신 질환에 대해 충분히 경험하고 많이 공부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정신병에 익숙한 사람들이고, 그래서 정신 질환에 대한 거부감이 적습니다. 그들이 정신병으로 인한 고통을 가장 가까이에서 감내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일반인들보다 정신병을 덜 두려워한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느껴집니다.
이런 제 생각대로라면, 정신 질환의 하나인 조울증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지식은 학습을 통해서 얻을 수 있습니다. 요즘에는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조울증에 관한 자료들을 꽤 많이 찾을 수 있습니다. 조울증 관련 신간도 꾸준히 나오는 추세입니다. 온, 오프라인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전문가가 작성한 것도 있고, 조울증 환자 당사자가 쓴 글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찾아서 읽어 보려는 의지만 있으면 조울증 이해를 돕는 자료들에 손쉽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이 글의 목적 중 하나도 조울증에 관한 정보를 공유하여 필요한 사람들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구체적인 사실과 제 개인적인 생각들이 구분되게 쓰려고 노력했습니다. 팩트뿐 아니라 저의 의견 역시 조울증을 직접 체험하면서 얻게 된 생각이므로, 참고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본적인 지식을 갖추고 조울증을 보면, 조울증 또한 다양한 질병 중 하나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조울증 환자는 실은 ‘아픈’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병에서 회복할 수 있는 여지도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성급하게 상종 못할 인간이라는 취급을 하기 전에, 치료의 대상이라는 점을 생각해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한편 조울증 환자 당사자들이 받는 상처는 사회적 편견과 낙인 때문일 때도 있지만, 그 못지않게 스스로 괴롭히는 것이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이 때문에 다음과 같은 패턴이 나타나기 쉽습니다. 조증 시기에는 흥분 상태인 데다가 자기반성이 잘 안 되기 때문에, 감정이 이끄는 대로 다양한 사건 사고를 일으킵니다. 그리고 그 열기가 식고 나서 우울기가 되면, 조증 때 일으켰던 문제들 때문에 자책하고 괴로워하게 됩니다. 스스로를 비난하다 보면 자존감에 심각한 손상을 입고, 우울증은 더욱더 깊어집니다.
이럴 때 조울증 환자의 불행은 자기편이 거의 없을 때가 많다는 점입니다. 가족들 역시 조울증의 직간접적 피해자인 경우가 대부분이라, 환자 당사자를 성심껏 도와주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스스로도 자신의 편이 되어주지 못할 때 조울증 환자들은 외롭다, 세상에 의지할 곳 없다는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어렵더라도 가족의 도움이 꼭 필요한 이유입니다.
그러나 주변 여건이 항상 환자에게 유리하게 풀리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조울증 환자는 스스로 병을 관리하는 능력과 요령을 체득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때때로 가족과 주변인들의 도움이 있어야겠지만, 기본적인 치료와 관리에 대한 최종적인 책임은 환자 본인에게 있다고 마음먹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려면 끊임없는 자아 성찰, 그리고 실패나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런 의미에서도 조울증 치료와 관리에는 완성 혹은 완벽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보다는 꾸준히 노력하여 그 상태에 점점 다가가는 과정 자체가 조울증 치료의 본질인 것 같습니다. 대개 평생을 두고 관심을 가져야 하는 조울증의 특성상, 환자 당사자가 자신을 방치하지 않으려는 자세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때로 조울증 치료와 관리는 순례자의 긴 여행같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조급하게 굴지 말고, 여유를 가지고 접근해야 마음이 편합니다. 아마도 이 여행은 살아있는 동안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행을 하면서 늘 힘들기만 한 것은 아니듯이, 조울증과 함께 하는 삶 속에서도 반짝반짝 빛나는 순간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희망을 잃지 말고, 차분하게 이 여행을 음미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