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해(深海)의 우울

심한 우울증에 빠졌을 때

by 폴짝
언젠가 네가 사라지고 나면 난 길 잃은 조개껍질처럼 혼자 깊은 해저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니겠지.
-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중 조제의 대사


보통 조울증 하면 바로 떠오르는 것은 감정이 폭발하고 광기가 드러나는 조증 시기입니다. 그만큼 조울증의 두드러져 보이는 특징이 나타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조증과 짝을 이루고 있는 우울증은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우울증 역시 조울증의 주요 증상 중 하나이며,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를 동반하기 때문에 이 시기에도 세심한 주의기 필요합니다.


조증의 폭풍이 한 차례 휘몰아친 뒤에는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진해서 완전히 기운이 빠진 상태가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조증이 심했던 정도만큼 심각한 우울증을 겪게 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한동안 넘쳐나던 의욕은 사라지고, 기존에 몰입했던 문제들은 관심 밖의 일이 됩니다.


제가 경험한 바로는, 조증기에서 우울기로 넘어가는 과정은 마치 심해어가 되어 깊은 해저로 가라앉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렇게 빛도 소리도 없는 캄캄하고 적막한 곳으로 일단 들어가게 되면 언제 빠져나올 수 있을지 기약이 없습니다. 심해가 너무나 깊고 캄캄하며 어마어마한 압력이 작용하기 때문에 아무나 갈 수 없는 곳인 것처럼, 우울증에 빠진 환자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접근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저 천천히 굴러다니며, 아래는 바닥이고 위는 수면인가 하는 막연한 느낌 정도만 있을 뿐입니다. 다시 에너지가 넘치는 시기가 되어 수면으로 올라갈 수 있기를 하염없이 기다리지만,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릅니다.


우울기가 오면 저는 이렇게 막막한 심정이 되곤 했습니다. 운 좋게 금방 우울증에서 빠져나오게 되는 경우는 그나마 다행이지만, 우울기의 갑갑한 상태는 때때로 몇 개월이나 계속되기도 합니다. 제 경우에 가장 긴 우울기는 1년을 훨씬 넘겨 계속된 적도 있었습니다.


제 마음속에 있는 우울증의 이미지를 심해로 표현했지만, 현실에서는 우울기에 주로 방구석 폐인 생활을 할 때가 많았습니다. 밥도 식구들과 함께 먹기가 힘들어서 방으로 가져다 따로 먹을 정도였습니다. 샤워는커녕 세수나 양치하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그나마 밖에 나가는 것도 담배를 사러 가는 정도가 전부였습니다. 가끔 지인으로부터 연락이 와도 어떤 주제로 대화할지 막막하여 전화를 받지 않았고, 결국 사람들과의 연결도 끊겼습니다. 이처럼 극도로 고립된 상태였기 때문에 심해어의 비유가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울증이 심해지면, 명료한 사고를 하기도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이 고통스러운 개미지옥에서 탈출할 수 있을 방법을 궁리해 봐도 답이 안 나오고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조울증 환자들은 대개 조증기보다 우울기를 훨씬 힘들어합니다. 단순히 생각하면 기분이 가라앉았으니 항우울제를 먹으면 간단히 해결될 것 같지만, 조울증은 그 특성상 항우울제를 썼다가 갑자기 조증으로 기분이 튀어 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치의도 웬만해서는 항우울제를 처방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울증의 기운이 물러가기를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는 것 밖에는 별 수 없는 상황이 자주 벌어집니다.


억지로라도 운동을 하거나 친한 사람을 만나는 등의 외부 활동을 할 수 있다면 우울증 개선에 상당히 긍정적인 효과가 있지만, 이것은 조울증 환자에게 비현실적인 해결책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우울증에 빠진 환자에게 이런 일들은 너무나 힘들기 때문입니다. 마치 며칠 동안 밤을 새워서 잠이 쏟아지는데 스스로 깨어나려고 노력해 봤자 소용이 없는 것과 비슷합니다. 심하게 졸릴 때는 잠을 깨도록 명령을 내려야 하는 두뇌 자체가 졸린 상태이기 때문에 잠에서 깨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울증에 빠진 뇌는 우울증에서 벗어나기 위한 활동을 하라는 명령을 내리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이런 이유로 일단 우울증에 빠지면 쉽게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심한 우울기 때 저는 병원에도 잘 못 가곤 했습니다. 병원까지 갈 기운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답답하고 죽을 것 같은 상황 끝에, 결국 작은 의욕 한 조각이 떠오를 때가 오게 됩니다. 그러면 저는 제일 먼저 병원을 찾고 다시 치료를 시작했습니다. 곧바로 다가올 수 있는 조증기를 또다시 대비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상대로 조증이 찾아옵니다. 가벼운 경조증 수준에서 멈출 때도 있었고, 드물게 꽤 심한 조증까지 갈 때도 있었지만, 제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확실한 병식이 있다면 조증을 방어하는 것이 우울증을 막는 것보다는 상대적으로 쉬웠습니다.


우울증에서 급격하게 조증으로 넘어가는 과정은, 이번에는 심해어가 해저에서 수면으로 급하게 올라오는 것과도 비슷합니다. 잠수사가 충분한 시간을 들이지 않고 급하게 수면으로 올라오면 잠수병이 생길 수 있듯, 오랜 기간 심해의 압력에 적응되어 있던 심해어가 수면으로 갑자기 상승하면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우울기에서 빠져나올 때는 천천히 적응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긴 시간 동안 무척 답답했기 때문에 마침내 거기에서 벗어난 기분을 만끽하고 싶을지 모르나, 조울증 환자는 이럴 때조차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합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시기에 자해나 자살을 시도하는 조울증 환자가 많습니다. 우울기에는 삶에 대한 희망을 잃었어도 행동에 옮길 에너지조차 없다가, 우울기를 벗어나면서 생기는 에너지로 자해를 하게 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가족들을 포함한 주변인들은 조울증 환자가 우울증에서 벗어나는 시기에도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울감이 사라졌다고 마냥 좋은 일만은 아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조울증의 전체 기간 중 우울기가 더 길고, 조증기는 짧은 편입니다. 조증기는 에너지 소모가 굉장히 많아서 보통은 오랫동안 유지되지 않습니다. 그러고 나면 또 우울기가 올 가능성이 많기에 이 또한 대비해야 합니다. 조울증 환자의 삶에는 느긋할 틈이 별로 없습니다. 조울증의 관리에서 조증 재발을 방지하는 것은 주로 주변에 피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우울증 재발을 막는 것은 자신을 위해서 중요합니다. 그리고 우울증의 시기가 대개 더 길기 때문에, 조울증 환자가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우울증을 방지하고 잘 관리하는 것이 무척 중요합니다.


우울증 시기에 조울증 환자는 보통 얌전히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가족 입장에서는 차라리 다행이라고 여겨서 환자를 방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당사자의 속은 썩어 들어갑니다. 이렇다 보니 우울증을 잘 대비하는 것은 조울증 환자 스스로 해야 할 몫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쉽지는 않겠지만, 우울증을 다루는 기술도 조울증 환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 중 하나입니다.


앞서 제 경우에는 일단 깊은 우울증에 빠지면 기다리는 것 외에는 별다른 수가 없었다고 말씀드렸지만, 사실 방법이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선 수면 시간을 일정하게 하는 것입니다. 아침에 해가 떴을 때 일어나는 것은 두뇌의 활동 패턴을 일정하게 만들어 뇌 건강에 도움이 됩니다.


또한 산책이 우울증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산책을 하면 운동을 통해 두뇌에 활력을 주고, 적당량의 햇볕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일거양득입니다.


사실 이 두 가지만 할 수 있어도 우울증 극복에 큰 도움이 됩니다. 문제는 우울증이 심하면 의욕이 사라져 이 정도 일도 하기 힘들다는 점입니다.


이런 일들을 하는 것이 도저히 어렵더라도, 최소한의 활동이라도 하도록 노력해 볼 수 있습니다. 산책이 어렵다면 편의점이라도 다녀온다든지, 밖에서 햇볕을 쏘이기가 힘들다면 햇볕이 들 때 내 방 창가에 가까이 가서 바깥 풍경을 바라볼 수도 있고, 양치하는 것이 어렵다면 가그린으로 대신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우스울 정도로 사소한 일처럼 보이지만 환자 입장에서는 필사적인 노력일 수 있고, 이런 작은 변화를 통해 우울증이 개선되는 계기를 만들 수 있습니다.


사실 조울증의 원점은 우울증일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조울증의 첮 발병은 우울증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우울기가 조증기보다 훨씬 더 길다는 점, 그리고 조울증 환자 당사자가 느끼기에 정말 괴로운 시기가 우울기라는 점도 생각해 볼 지점입니다.


조증에 비해 덜 튄다고 해서 우울증이 더 가벼운 문제인 것은 아닙니다. 우울증 관리는 조울증 환자가 삶의 질을 확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우울증을 겪지 않거나, 적어도 우울기를 가볍게 넘길 수 있다면 조울증이라는 병을 견디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물론 조증 관리에도 소홀하지 않도록 신경 써야 합니다. 조증은 파괴적인 결과를 일으키기 쉬운 만큼, 심한 조증이 재발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 역시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우울증을 잘 다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자꾸 강조하는 이유는, 제 경험상 조증보다 우울증을 조절하기가 더욱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조증이 짧고 강렬하다면, 우울증은 길고 묵직합니다. 상대적으로 덜 뜨거운 온도에 장시간 노출되어 생기는 저온 화상이 피부 깊숙한 곳까지 세포를 파괴하여 일반 화상 못지않게 심한 피해를 줄 수 있는 것처럼, 우울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울증 때문에 입은 손상이 심각한 정도로 축적되면 환자가 삶을 포기하는 선택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겉으로 조용해 보인다고 우울증을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됩니다.


현실에서 심해어가 해저를 벗어날 일은 없습니다. 비유는 비유일 뿐입니다. 하지만 조울증 환자의 우울기에는 분명 한 줄기 햇살이 비칠 때가 옵니다. 이 타이밍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햇살을 잘 붙잡는 것으로부터 조울증 치료도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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