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15년

돌아오지 않는 시간

by 폴짝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다.
- 헤라클레이토스


조증과 우울증, 그리고 그 중간쯤인 상태를 오가면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조증 때는 시간이 천천히 가고, 우울증 때는 시간이 빨리 가는 것처럼 느껴지더라는 것입니다.


조증 상태일 때는 두뇌 회전이 굉장히 빨라지기 때문에 짧은 시간 안에 아주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상대적으로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은 감각을 느끼게 됩니다.


반대로 우울증 시기에는 두뇌 회전이 느려집니다. 우울증을 겪는 그 순간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해서 지루하다가도,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면 며칠, 몇 주가 훌쩍 지나 있는 경험을 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우울증 때는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는 것 같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리 지나가는 것처럼 느낀다고 합니다. 나이가 들면 사고의 속도가 느려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이 빠르게 느껴진다고 하는데, 조울증의 시간 감각이 왜곡되는 원리와 비슷한 면이 있어 보입니다.


그런데 제대로 관리하지 않은 조울증 환자의 경우, 조증과 우울증일 때 모두 시간을 낭비하기 쉽습니다. 이것은 시간의 속도와는 무관합니다. 빠르게 시간을 낭비하느냐, 천천히 시간을 낭비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조울증을 겪은 유명인들은 흔히 ‘잃어버린 00년’이란 표현으로 조울증 경험을 회고하곤 합니다. 잃어버린 기간은 때로 10년, 혹은 20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제 경우는 이 시기를 잃어버린 15년이라고 부릅니다.


처음 조울증 진단을 받은 이후로, 지금까지 조울증과 씨름하느라 삶을 제대로 누리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기간을 따져 보니 대략 그 정도 되기 때문입니다. 대체 왜 15년이나 걸렸을까? 나는 인생에서 15년만큼을 버린 것일까, 하고 스스로 질문을 많이 던지곤 했습니다.


첫 5년 정도는 조울증으로 진단받은 후 조울증을 받아들이기 전까지 걸린 시간이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시기는 첫 진단, 첫 입원, 그리고 치료를 중단한 뒤 겪었던 강렬한고 길었던 조증 기간 등, 조울증을 처음 경험하면서 저질렀던 실수들로 점철된 시간이었습니다. 조울증에 휘둘려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밖에는 표현 못할 사건들을 일으켰던 기간으로, 그때까지 이루었던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말았습니다.


이어지는 10년 정도는 조울증 치료와 관리 방법을 찾아가는 시기였습니다. 많은 조울증 환자들과 마찬가지로, 그 과정에서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고, 아주 천천히 최적화된 치료 방법에 접근해 가는 여정이었습니다.


15년을 요약하니 정말 간단해 보이는데, 사실은 길었던 이 기간 동안 드라마틱한 일들이 정말 많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굳이 그 사건들을 다 나열하는 것은 불필요한 것 같아 여기서는 생략하겠습니다.


그런데 잃어버렸다는 이 15년 세월은 아무 의미 없는 기간이었을까요? 그 시간은 과연 낭비였을까요?


저는 그렇지만은 않다고 생각합니다. 조울증과 함께 한 시간들 역시 제 삶의 일부이고, 이로부터 얻은 것 또한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조울증 진단 후 15년간은 그보다 더 많이 남아 있는 인생을 위해 꼭 필요한 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기왕이면 그 시간이 짧았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지금은 조울증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배우기 위한 비싼 수업료였다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조울증이 발병한 후, 평생 조울증으로 고통받는 환자가 많이 있습니다. 특히 정신건강에 관한 관심이 적어서 조울증을 잘 몰랐던 예전 세대 어르신 중에 조울증을 앓은 분들의 경우, 돌아가실 때까지 조울증인지 모르고, 그저 성격이 참아줄 수 없을 정도로 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은 분들이 많았을 것이라는 짐작이 갑니다. 그와 비교한다면, 저의 15년이란 기간이 평생으로 길어지지 않았던 것만 해도 다행인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정적으로는 이 15년을 '잃어버렸다'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을 때가 있습니다. 류시화 시인의 시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이란 제목처럼, 지금 조울증에 관해 알고 있는 만큼 그때도 알았더라면, 그 수많은 실수들을 하지 않을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진단을 더 일찍 받았더라면, 치료를 더 일찍 시작했더라면, 약을 더 잘 먹었더라면, 술을 마구 마시지 않았더라면, 가족과 관계를 잘했더라면……. 이런 가정법은 후회만 남길 뿐 별 소용도 없지만, 심정적으로 놓쳐 버린 시간에 대해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나 봅니다. 하지만 이런 마음이 들 때일수록 정신 승리가 더욱 필요합니다. 그래서 좀 억지스럽더라도 각자의 잃어버린 시간이 있다면 거기에 의미를 부여해 보는 건 어떨까 생각해 봅니다.


잘 살든 못 살든, 선하게 살든 악하게 살든, 훌륭하게 살든 비참하게 살든 간에 삶의 시간은 흘러갑니다. 어떤 물리학자가 시간에 관해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시간이란 개념은 만들어진 것이고, 실제로 우주에 시간이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 말대로라면 시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데, 시간이 절대적인가 상대적인가를 따지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일상에서 시간 개념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시간의 절대성에, 때로는 시간의 상대성에 의존해서 살아갑니다.


일례로 ‘나이란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은 시간의 상대성을 말하는 대표적인 표현이 아닐까 합니다. 물론 흔히 서로 나이를 비교하고, 나이 차이를 따지는 사회적 관습(존댓말, 서열 등)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나이가 숫자에 불과다는 말에 일정 부분 동의하는 이유는, 삶의 속도는 개인마다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마다 경험하는 삶의 내용과 질이 다르고, 따라서 어리다고 모자라다고 단정할 수 없고, 나이가 들었다고 반드시 더 지혜롭다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조울증 환자와 비환자의 시간도 절대적으로 비교하기 어렵습니다. 조울증 환자가 병 때문에 많은 시간을 낭비했다 치더라도, 남은 인생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큰 성취를 이룬 예도 많습니다. 조울증을 앓았던 예술가, 과학자, 정치인들의 예는 무척 많아서, 책이나 검색을 통해 쉽게 찾아볼 수 있기도 합니다. 어쩌면 조울증 환자가 희망을 찾을 수 있는 실마리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울증 환자는 남은 인생에 관해 어떤 전망 혹은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요? 제 생각입니다만, 나의 삶이 흘러가는 속도도 시기에 따라 상대적인 것 같습니다. 이런 생각은 조증과 우울증 시기에 시간이 다른 속도로 흘러갔다는 개인적인 경험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현재가 ‘잃어버린 시간’에 속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생각해 볼 일입니다. 만약 조울증 치료와 관리를 제대로 하고 있다면, ‘잃어버린 시간’에서 벗어나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 경우, 정상적인 삶으로 복귀하는 시점에 가까울 것으로 보입니다. 오랫동안 길을 잃고 헤매다가, 다시 제 궤도로 돌아오는 것은 많은 조울증 환자들에게 큰 목표입니다.


일반적으로 어떤 목표를 이루겠다고 마음먹으면,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을 따져보고 단계별로 실행에 옮기게 됩니다. 목표가 이루어졌을 때를 상상만 하고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당연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조울증에서 벗어나 일상으로 복귀하기 위해서도, 우선순위별로 실행해야 할 체크리스트를 만드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 체크리스트는 각자 궁리하여 만들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잃어버린 시간이 끝나간다는 느낌이 온 순간이 있었습니다. 조울증 때문에 일어났던 사건들과 망가진 인간관계 때문에 생긴 자괴감으로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게 된 때입니다. 이미 벌어진 일들을 받아들이고, 그 일들의 원인을 고찰하고, 그래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자, 마음이 편해졌고 다소간의 기분 변화 때문에 일희일비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조울증을 짐짝으로 여기고 머리에 지고 가거나 등에 업고 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면, 두 팔이 자유롭지 못해 다른 일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울증은 맞춤옷처럼 입고 가야 한다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조울증에 백 퍼센트 완치란 없다는 저의 개인적인 생각에 따르면, 조울증은 일단 발병하면 평생 함께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어차피 같이 데려가야 하는 조울증이라면, 가능하면 내 몸에 맞춰 움직일 때 불편하지 않도록 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조울증이 무거운 짐이 아니라 관리할 수 있는 나의 일부가 된다면, 더 이상 조울증 때문에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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