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울증 치료 시즌 2
가장 어두운 밤도 끝이 나고,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 빅토르 위고, <레 미제라블>
우울증이 최고로 깊어졌을 때에는 아무런 의욕도 생기지 않고 희망이라고는 없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그 기간은 무척이나 길었습니다. 한편으로는 한겨울 속에서 얼어버린 듯한, 또는 반대로 사막에서 한없는 갈증을 느끼며 방황하는 것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긴 시간도 지나고, 결국 우울증이 물러가는 때가 왔습니다.
드디어 우울증이 끝났다는 것을 알아챈 것은 경조증이 시작되었음을 느꼈을 때였습니다. 마침내 기운이 샘솟기 시작한 것은 기뻐해야 할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만큼은 경조증이 반갑지 않았습니다. 과거 조증기의 실수 때문에 벌어진 피해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경조증의 에너지로 문제를 일으키기 전에, 어서 치료를 다시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번에는 변화가 조금 있었습니다. 우선 병원을 바꿨습니다. 처음 다녔던 병원은 대학병원이었는데, 담당의가 이 분야의 권위자이기는 했지만 큰 병원의 특성상 환자가 너무 많아 진료를 받으려고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길었고, 막상 진료 시간은 몇 분밖에 되지 않아서 충분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큰 병원은 나름의 장점이 있지만, 당시 제 상황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새로 찾은 병원의 주치의 선생님은 시간을 충분히 들여 제 이야기를 경청했고, 처방을 내릴 때도 제 의견을 존중해 주었습니다. 어떤 병들은 치료하기 위해서 환자의 노력뿐 아니라 운이 많이 작용하는데, 이 경우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제가 두 번만에 잘 맞는 병원, 주치의를 찾은 것은 운이 좋아서였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환자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더 많은 시행착오를 겪는 경우도 많은 것 같습니다. 물론 조금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그때마다 의사를 바꾸는 것이 바람직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전혀 안 맞는 의사의 진료를 계속 받으면 치료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저와 잘 맞는 의사를 만났음에도, 조증 증상이 안정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 정도로 조증은 상당히 심각했습니다. 결국 약의 종류와 용량을 여러 번 바꾼 끝에야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서야 발병 이후 처음으로 조울증으로부터 편해진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때 설정한 처방약의 종류와 용량은 지금도 크게 바꾸지 않고 유지하고 있습니다.
처방약을 조정해 나갈 때는 환자별로 약물에 대한 반응성이 천차만별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자신에게 맞는 약물을 쉽게 찾는 반면, 다른 이들을 적절한 처방을 찾기까지 무척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 상당한 인내심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이 과정이 쉽지 않더라도 조울증 치료에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약물 치료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당장 호전되는 느낌이 약하거나 부작용이 조금 있더라도, 환자는 약물에 대한 믿음을 잃지 말고 꾸준히 복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의 상태와 약이 전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거나 부작용이 심하다면 주치의와 상담해서 조정하면 됩니다. 환자의 합리적인 호소에도 약물을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의사는 그리 많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조울증 치료를 본격적으로 다시 시작하면서, 약물 치료만으로는 아쉽다는 생각이 들어서 심리 상담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어디 가서도 하소연하지 못했던 속 깊은 이야기들을 털어놓을 수 있었는데, 이런 내용은 가족들과도 쉽게 할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것은 병증을 관리하는 데 실제로 도움이 되었습니다. 마음속에 정체되어 있던 스트레스가 해소되고, 머릿속에서 맴돌기만 할 때에는 혼란했던 생각들이 말로 풀어내면서 많이 정리되었습니다. 이런 과정은 자신을 재발견하는 계기가 되었고, 내가 현재 조울증의 어떤 증상에 해당하는지 알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정기적으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조울증 환자는 기분과 생각이 급격히 변화하면서 기억이 불분명해지는 시기가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일기 쓰기를 습관화하면 나중에 기록을 들춰봤을 때, 당시의 기억과 감정이 떠올라 스스로 어떤 상태였구나 하는 것을 복기할 수 있어서 도움이 많이 됩니다.
한편으로는 이때부터 조울증에 관한 경험담과 관련 정보를 공유하기 위한 글을 블로그에 쓰기 시작했습니다. 공개된 글을 쓰는 작업은 일기와는 또 다른 측면에서 조울증 치료에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조울증에 관한 정보를 올리려면 그만큼 공부를 해야 했고, 자연스럽게 제가 앓고 있는 이 병에 관해서 더 잘 알아가게 되었습니다. 또한 제 경험담을 공유하기 위해 그간 있었던 일을 기억해 내고 정리하는 과정은 제 병증의 시작과 경과에 관해 정리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기록은 기억은 지배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꼭 거창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기분을 그때그때 기록하는 것은 조울증 관리에 상당한 도움이 됩니다. 만약 손으로 쓰는 일에 익숙지 않다면, PC나 스마트폰 앱을 사용하는 것도 좋습니다. 기분 일기 앱 등을 이용하면 매일 있었던 일과 기분을 손쉽게 기록할 수 있습니다. 처음 일기를 쓰기 시작할 때는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 쉽지만, 몇 달 혹은 몇 년씩 기록이 쌓이다 보면 일기가 가진 힘을 점점 체감하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에너지가 올라온 시기에 할 수 있도록 취미 생활이나 공부 등, 몰입할 수 있는 소일거리를 마련하는 것도 좋습니다. 에너지가 넘칠 때 쓸데없는 곳에 낭비하지 않고 긍정적인 일에 쓰게 되면 불필요한 실수를 예방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제 경우에는 코딩 공부가 여기에 해당했습니다. 코딩은 공대 출신인 제 적성에도 맞았고, 무엇인가를 창조해 낼 수 있다는 즐거움을 주었습니다. 우울기가 오면 일정 부분을 까먹었다가 나중에 다시 공부하기를 반복해야 하는 점은 좀 불편하긴 하지만, 조금씩이나마 확실히 전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본인에게 맞는, 치료에 도움이 되는 일들은 위와 같은 것들 외에도 찾아보면 많이 있을 것 같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이 들려고 할 때 그 생각의 방향을 조금만 틀어 이러한 것들을 궁리해 볼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다시 한번 제 의견을 정리하자면, 조울증 치료의 전제 조건은 약물 치료입니다. 처방약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약물 치료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자신과 잘 맞는 병원, 주치의를 찾아야 합니다. 이 조건을 만족하고 나서, 그 밖에 도움이 될 만한 여러 가지 시도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활동은 조울증의 치료에도 도움이 될뿐더러 증상을 관리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수 있으므로, 역시 자신에게 잘 맞는 다양한 방법들을 시도해 보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