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스, 조울증의 방아쇠

조울증과 스트레스

by 폴짝
핑계 없는 무덤 없다.
- 속담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스트레스로 많은 병을 설명할 수 있다는 의미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마침, 조울증 발병의 주된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스트레스입니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심한 스트레스를 받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조울증 환자는 특히나 스트레스에 매우 취약한 기질을 가지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조울증의 발병이나 재발의 원인이 되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조울증 환자는 이른바 스트레스 역치가 낮다는 뜻입니다.


제 경우 처음 조울증이 발병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였습니다. 저는 중학교 때 공부를 제법 잘했고 덕분에 명문고에 진학하게 되었는데, 막상 공부를 잘하는 동급생들 속에 있게 되자 상대적으로 성적이 많이 떨어졌습니다. 한때 우등생이었던 제가 갑자기 열등생이 되었고,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에는 제 멘탈이 너무 약했습니다. 결국 잠재되어 있던 조울증이 발병하면서 처음에는 심한 우울증 증세가 왔습니다. 공부에서 완전히 손을 놓고 밤새 게임만 하는 나날이 꽤 오래 이어졌습니다. 이 일이 있은 이후로 이삼십 년간 조울증 증상이 자주 나타났고, 증상의 정도가 점점 커지고 재발이 잦아지는 시기를 보내게 됩니다.


스트레스 때문에 심각한 조증을 겪었던 예도 있습니다.


애니메이션 학교를 졸업한 뒤, 모 대학원의 디지털 애니메이션 연구실에 취직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친하게 지내던 석사과정 학생이 있어서 같이 일도 많이 하고 사적으로도 가깝게 지냈는데, 사실 선을 넘나드는 그의 성격 때문에 상당히 부담을 느끼고는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졸업한 뒤, 주변을 살펴보니 저는 고립되어 있었고 제가 했던 많은 일들은 그의 공적으로 돌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모르는 사이 이용당하고 가스라이팅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감정이 폭발하며 처음으로 아주 심한 조증 증상이 나타났습니다. 그가 남기고 간 물건들을 모두 연구실 밖으로 끄집어내 내팽개치고, 주변 사람들에게 그에 대한 듣기 힘들 정도의 비난을 하는 등, 정상을 벗어난 행동을 많이 했습니다. 약 두세 달 정도 조증의 폭풍은 잦아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저의 행동을 어느 정도 납득해 주었던 까닭은, 아마 제가 이용당하고 있던 것을 많은 이들이 이미 눈치채고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겪은 이 두 가지 예처럼, 조울증 환자에게 스트레스는 증상을 발현시키는 방아쇠(trigger)가 됩니다. 조울증이 발병하기 전 에너지가 축적되는 시기는, 탄약을 장전하고 노리쇠를 당겨 놓은 것과 같이 언제든지 방아쇠만 당기면 발사되는 총과 비슷한 상태입니다. 스트레스가 방아쇠 역할을 한다는 의미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별문제 없이 조용해 보이다가도, 특정 사건 때문에 조울증이 촉발되는 이유가 이런 원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기질적으로 스트레스에 약한 조울증 환자의 특성상, 가능하면 스트레스를 피하고 심한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는 상황 차체에 뛰어들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이런 태도는 나약해 보일 수도 있으나, 조울증 재발을 막기 위해선 꼭 필요합니다.


조울증이 괴로운 이유 중 하나가 재발의 가능성이 늘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병의 관리를 잘하던 중에도 스트레스를 받는 특정 상황이 되면, 재발은 생각보다 쉽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스트레스 내성을 약하게 하는 주요 원인 중 하나는 수면 부족입니다. 병원에 가면, 주치의가 늘 물어보는 것이 수면의 질과 양에 관한 내용입니다. 잠을 잘 자는 것이 건강에 좋다는 사실은 이제는 일반인에게도 상식이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조울증 환자에게 잠이 갖는 중요성은 더 특별합니다. 잠이 부족하게 되면 조증이 촉발되는지, 혹은 조증 때문에 잠이 없어지는지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것 같아서 선후 관계가 명확하지는 않지만, 조울증 환제에게 충분한 수면을 취하는 일은 필수적입니다.


보통 조증 시기에는 잠을 거의 자지 않게 되거나, 혹은 겨우 서너 시간 잠을 자면 충분하다고 느끼게 됩니다. 불면증과는 다릅니다. 불면증은 피곤하고 졸린데도 잠을 못 자서 괴로운 상태라면, 조증 시기의 수면 부족은 잠을 거의 안 자도 피곤함을 느끼지 않고 에너지가 넘치는 모습을 보입니다. 잠을 안 자면 조증이 심해지고, 조증이 심해지면 잠을 또 안 자는 악순환에 빠집니다. 이런 일을 막기 위해서, 조울증 환자는 본인의 수면 상태를 항상 체크해야 합니다.


조울증을 치료할 때 전문의들이 직 언급은 잘 안 하지만, 제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커피(카페인)이나 담배(니코틴)와 같이 뇌를 각성시키는 물질은 자제하거나 끊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들 각성제는 수면의 질과도 관계가 있으며, 기분 조절 작용에 간접적으로나마 영향을 미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향정신성 물질 역시 수면 부족과 마찬가지로 스트레스에 대한 내성을 약화시킬 수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커피나 담배와 달리, 의사 선생님들이 절대 피해야 할 것으로 주의를 주는 것이 바로 술입니다. 조울증 환자들은 일반적으로 술과 약물 중독에 취약합니다. 그래서 술을 많이 마시기 쉽고, 그러면 스트레스를 견디는 정신적 저항성이 약해지며, 약해진 멘탈을 달래기 위해 또 술에 의존하게 됩니다. 이번에는 알코올 의존이라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지게 되는 셈입니다. 저는 술을 거의 끊다시피 하고 술에 의존하지 않게 되면서 스트레스에 대한 면역이 상대적으로 튼튼해졌다고 느낍니다.


한때 술 예찬론자, 혹은 심한 알코올 의존증 환자였던 적이 있습니다. 술꾼들은 기쁘면 기뻐서 술을 마시고, 화가 나면 또 화가 나서 술을 마십니다. 하지만 정도가 지나쳐 알코올 의존 상태에 들어가 있었을 때 저는 현실 도피를 위해 술을 마시는 경우가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어린 왕자>에 등장하는 주정뱅이 별의 술꾼이, 술 마시는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서 술을 마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술을 마신다고 스트레스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술은 단지 임시방편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조울증 환자이면서 술을 취하도록 마시는 일이 잦다면, 일단 술을 끊어 볼 것을 강력히 권하는 바입니다.


한편, 건강을 지키려면 운동을 해서 체력을 길러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조울증 재발을 막으려면 평소에 정신적 체력을 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조울증 재발이라는 위기 상황이 닥치더라도 최소한 피해를 적게 입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스트레스 저항성을 키워야 하는 이유는, 현실에서 스트레스 상황을 완전히 배제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본적으로 스트레스에 대한 대비 태세를 취하는 동시에 가능하면 스트레스를 회피하려는 노력도 해야 합니다.


어쩔 수 없는 스트레스가 닥쳤을 때 피해를 적게 받고 또한 스트레스 자체를 줄이기 위해서는, 상황에 대한 유연한 마음가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편이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를 막을 수 있습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 취지에는 공감하는데, 불가항력으로 일어나는 일들 때문에 일일이 괴로워하면 스스로 스트레스의 강도를 키우게 되는 셈입니다. 포기할 부분은 빨리 포기하고, 다음에 나아갈 방도를 찾아야 합니다.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가 이 시점에서 필요합니다.


저의 짧은 경험에 따르면, 세상 일 중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은 상당히 적어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손으로 바꿀 수 있는 아주 작은 것들에서부터 나와 내 주변 사람들, 그리고 세상이 바뀌기 시작한다고 생각합니다. ‘운칠기삼’이란 말도 이와 비슷한 맥락을 가진 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바꿀 수 없는 것과 바꿀 수 있는 것을 구분하기란 종종 어려운 일입니다. 특히 조울증의 격랑으로 감정이 요동치는 가운데에서 이런 것들을 구분해 내려면 상당한 노력과 경험이 필요합니다. 그래도 조울증과 함께하는 삶 속에서 이러한 기술을 익히지 않으면 계속 곤란한 상황이 반복되기 십상입니다.


정신적으로 스트레스 내성을 키우기 위해서 중요한 또 다른 측면은 신체적인 요인을 소홀히 하지 않는 것입니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마음이 깃든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을 잘 생각해 보니, 뇌과학적인 측면에서도 제법 맞는 것 같습니다. 신경세포는 뇌에 집중되어 있지만 동시에 온몸에 퍼져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생각은 온몸에 확장되어 있는 것과도 같은 측면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몸과 마음의 상태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마음 건강은 몸 건강과 같이 가야 합니다. 그래서 조울증을 관리하려면 규칙적인 운동과 신체 리듬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조울증에 좋은 몸 건강 관리 방법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우선 앞서 말했듯이 수면의 양과 질을 확보해야 합니다. 정해진 시간에 자고 일어나며, 충분한 시간 동안 숙면은 취하는 것은 두뇌를 건강하게 하며 조울증 예방에 필수적입니다. 그리고 규칙적인 운동을 하고 충분히 햇볕을 쬐는 것이 좋습니다. 산책은 이 두 가지를 모두 실행할 수 있는 좋은 운동법입니다.


이렇게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신체적인 예방법이 조울증 환자 입장에서는 실천하기 쉽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특히 심한 우울증에 빠지면 아무것도 할 의욕이 나지 않기 때문에 산책은커녕 방 밖으로 나가기도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소에 가능한 한 산책을 챙기고 잠을 잘 자게 되면 심각한 증상을 예방하거나 적어도 증상을 겪는 기간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됩니다.


결론적으로 스트레스를 이기는 힘은 ‘태도’에서 나오는 것 같습니다. 스트레스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또 어떻게 다루는가 하는 것이 자신의 태도와 크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렸다거나, 강한 의지로 조울증을 극복할 수 있다는 식의 의지 만능주의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조울증 치료와 관리에 가장 중요하면서도 기본이 되는 것은 적절한 약물 치료입니다. 다만 환자 본인이 삶에 대한 태도나 자세를 제대로 설정하는 것이 모든 일의 출발점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조울증은 결코 내 마음먹은 대로 되는 병이 아닙니다. 마치 축구에서 페널티킥을 막아내야 하는 골키퍼처럼, 키커의 움직임을 보고 읽은 부족한 정보를 근거삼아 어느 한쪽으로 뛸 수밖에 없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만약 점프하지 않는다면, 공을 막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집니다. 어디에서 나타날지 모르는 스트레스에 항시 대비하고 스트레스를 잘 막아내기 위해서도 내 선택에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자존감을 키우고 요령을 익히다 보면 스트레스라는 조울증 최대의 적을 점점 잘 대처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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