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울증 발병이라는 루비콘 강

일단 조울증이 발병했다면

by 폴짝
주사위는 던져졌다.
- 율리우스 카이사르


조울증은 일단 발병하면 병이 생기기 이전으로 돌아가기 어렵습니다. 한 번 조울증 환자는 평생 조울증 환자인 채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 조울증 재발을 여러 번 경험하고 난 뒤에 제가 갖게 된 생각입니다. 개인적이며 극단적인 의견처럼 보이지만, 많은 전문가들이나 환자, 보호자들도 여기에 동의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와 다르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왜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되었는지 설명해보고자 합니다.


저의 첫 조울증 발병은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고 짐작합니다. 병원에서 정식으로 진단받은 것은 이로부터 대략 15년이나 지난 다음이었습니다. 첫 발병이 언제라는 것도, 조울증을 진단받은 후 입원을 하고, 다양한 검사를 받고, 과거를 복기해 보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조울증이 처음 발병하고부터 진단까지 그 긴 기간 동안에 저는 조증과 우울증을 여러 번 겪어야 했고, 당시 조울증이란 용어조차 잘 모르던 저와 제 가족은 이 병을 그대로 방치했습니다. 감정이 폭풍같이 휘몰아치다가도 때로는 바닥을 모르고 가라앉는 일이 반복되는 것을 그저 제 성격 탓이라고만 여겼습니다.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것 같은 와중에도 대학을 무사히 졸업하고 군대를 사고 없이 만기제대한 것이 기적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조울증인 것을 알았다면 군 복무를 면제받았을 겁니다. 조울증 환자에게 총기와 실탄을 들려준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이므로, 조울증으로 진단받았다면 적어도 현역병으로 가지 않는 것이 본인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큰 문제없이 군대를 다녀온 것은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을 뿐입니다.


몇 년 뒤 조울증 진단을 받은 저는, 드디어 치료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조울증 환자들이 많이 겪는 시행착오를 저도 거치게 되었습니다. 치료한 지 몇 달 지나지 않아 약을 끊고 치료를 거부했습니다. 당시 약을 끊은 이유는, 처방약을 먹는데도 조증과 우울증이 계속 오는 등 나아지는 것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약 없이 ‘의지’로 병을 이기겠다는 객기를 부렸습니다. 얼마 후 아니나 다를까 심한 조증과 우울증이 장기간에 걸쳐 찾아왔고 제 삶과 인간관계는 엉망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렇게 몇 년을 보내며 병에 휘둘리느라 완전히 지치고 나서야, 저는 다시 병원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옮기게 된 두 번째 병원을 계속 다닌 지도 벌써 10년 가까이 되는데, 역시나 이 시기에도 치료와 관련해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맞는 약과 용량을 찾느라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고, 우울증이 심해지는 기간이면 병원을 몇 달씩이나 가지 못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기를 여러 번, 겨우 적절한 약으로 조정이 되고 나서야 비교적 안정적인 기분을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조울증 첫 발병으로부터 지금처럼 비교적 평화로운 마음상태가 되기까지 거의 30년 가까이 걸린 셈입니다. 이렇게 오래 힘겨운 시간을 보냈던 것을 생각하면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다른 환자들의 사례를 접하다 보면 저보다도 훨씬 심각한 경우도 많아 이만하면 다행인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제가 치료를 통해 기분을 안정시키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 데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처음 진단을 받고 치료를 시작하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 병을 방치했습니다. 둘째, 치료를 시작하고 나서도 치료에 집중하는 시간이 길지 못하거나 치료를 중단할 때가 많았습니다. 셋째, 체질상 정신과 약물에 대한 반응성이 좋지 못한 편이었습니다. 그래서 조정된 최근 처방 수준으로 약물 농도를 높이기까지 약물의 효과가 부족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효율적인 치료를 하지 못했기에 병이 많이 깊어졌고, 이제는 조울증 발병 이전 상태로는 돌아가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 일반적인 조울증 이야기로 돌아와서, 같은 조울증이라도 구체적인 증상은 환자마다 다릅니다. 발병하는 시기, 기분 변화 주기, 증상의 정도, 치료에 따른 예후 등이 가지각색으로 나타납니다. 넓게 보아 공통점이 있다면 우울증과 조증 상태가 일정 기간 이상 지속되고 또 반복된다는 사실입니다. 조울증이 최초 발병했을 때 제대로 진단받고 치료와 관리를 잘하는 환자가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병인지도 모른 채 조증과 우울증을 여러 번 겪고 나서야 치료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후자와 같은 경우가 훨씬 흔합니다. 어느 쪽이든 일단 조울증이 발병하고 나면 그다음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현재를 살고 있고 미래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한 전망은 자칫 지나치게 낙관적이거나 반대로 비관적인 쪽으로 쏠리기 쉽습니다. 게다가 조울증의 대표적인 특징인 극단성 때문에 조울증 환자는 이렇게 치우쳐 생각하는 경향이 더 심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조금 다르게 생각해 보자는 의미에서, 조울증 환자의 인생을 결말이 정해진 한 편의 영화라고 가정해 보았습니다. 이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면 최초의 발병, 그리고 몇 번의 재발 사건을 돌아보게 될 것입니다. 영화의 주인공이 어떤 타입의 조울증 환자인가에 따라 횟수의 많고 적음,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대부분 재발을 겪었을 것입니다. 거친 비유지만, 인생을 영화에 빗대서 이야기한 것은 제 나름대로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한 방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조울증 환자는 치료 과정에서 의식적으로 자신을 객관화하여 보아야 할 때가 많습니다.


사실 많건 적건 간에 재발이 일어난다고 표현한 것은 완전히 맞는 말은 아닙니다. 개중에는 조울증 발병 초기에 적절한 치료를 받고 이후 꾸준히 관리를 잘해서, 평생 재발하지 않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분이나 또는 주변 지인이 이런 경우라면 축하할 일입니다. 왜냐하면 많은 조울증 환자들은 이런 행운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운 좋은 경우에조차 ‘꾸준한 관리'가 필요하다는 사실 자체가, 조울증은 언제든지 재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암시합니다.


재발에 관해서 이야기하자면, 인생은 늘 내 맘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불시에 조증이나 우울증을 수면 위로 떠오르게 만드는 방아쇠가 당겨질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그런 방아쇠에 해당하는 것이 스트레스와 수면 부족입니다. 예를 들어, 생계를 위해 밤에 대리운전을 해야 하는 상황을 생각해 봅시다. 야간 대리운전 특성상, 수면 부족과 감정 노동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동시에 겪을 수 있어서 조울증에 아주 해로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먹고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게 현실이라,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도 있습니다. 꼭 이 예로 한정하지 않더라도 삶 곳곳에 조울증 재발의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방해물을 피하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생기게 됩니다. 그러면 조울증이 재발할 가능성이 무척 높아지고, 조울증 재발은 삶을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속으로 끌고 들어갑니다.


이처럼 주변 환경이나 상황 탓에 환자의 뜻과 무관하게 재발하는 경우도 있지만, 다름 아닌 환자 본인의 실수로 인해 재발하기도 합니다. 바로 제가 그랬던 것처럼 처방약을 임의로 끊을 때 벌어지는 일입니다.


치료 과정에서 많은 환자들이 '정신과' 약을 먹는다는 사실 자체에 거부감을 가져서, 혹은 약의 부작용 때문에, 가능하면 빨리 약을 끊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약을 완전히 안 먹게 되는 것을 '완치'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조울증은 언제든 재발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때로는 약을 먹고 있는 중에 재발하기도 하는 형편인데, 약을 안 먹으면 그 위험성이 훨씬 높아지는 것은 너무 당연합니다. 심지어 주치의의 판단 하에 약을 끊게 되었다고 해도 재발의 위험성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계속해서 조울증 재발을 강조하는 데에서 짐작하셨을 수도 있겠지만, 저는 조울증에는 백 퍼센트 완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성급하게 완치를 바라는 것보다는 주치의가 처방해 준 약을 복용하면서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며 또 현실적인 방법입니다. 물론 치료 경과에 따라 약을 줄여 나가다가 결국 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예후가 좋은 경우조차 꾸준한 관리가 필수적입니다. 그러므로 조울증에 완치가 없다는 제 생각의 초점은, 조울증에 대한 비관론이 아니라, 오히려 이 병을 잘 관리하면 된다는 희망에 맞춰져 있습니다.


조울증은 가볍게 여길 병이 아니라, 장기전을 각오해야 하는 만성 질환이라고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 흔히 조울증을 당뇨병과 비교하기도 하는데, 둘 다 완치는 어렵지만 약물 복용과 생활 습관 조절로 충분히 관리 가능하다는 점, 그리고 치료하지 않고 방치할 경우 심각한 결과에 이를 수 있다는 점이 공통적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결국 조울증의 어두운 면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잃지 않으면 마냥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지금까지 조울증이 한 번 발병하면 돌이킬 수 없다는 맥락으로 말씀드렸는데, 그렇다면 발병 전에 예방하거나 조기에 알아챌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생각해 본다면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먼저 예방에 관한 내용입니다. 조울증은 유전과 깊게 연관된 질병입니다. 그래서 ‘가족력’이라고 부르는, 가족 내에 기존 병력이 있는지 여부가 병을 진단하는 데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됩니다. 예를 들면 저희 집안에는 조울증과 관련되어 있다고 의심 가는 어른들이 최소 친가에 두 분, 외가에 한 분이 계셨습니다. 저의 조울증과 무관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단, 가족력이 있다고 해서 무조건 조울증이 발병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가족력이 있다면 충분히 조심할 필요는 분명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족력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조울증 증상의 조짐이 보일 때 선제적으로 대책을 세울 가능성이 훨씬 높습니다.


또 조울증을 초기에 인지할 수 있는 방법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감정이 들떴다 가라앉기를 일정한 기간을 두고 반복된다면 조울증을 의심해 볼 만합니다. 이런 경우, 의료기관 홈페이지 등에서 찾을 수 있는 공인된 조울증 자가 진단 문항을 체크해 보면 어느 정도 위험성이 있는지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단계에서 조울증이라고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면 안 되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 병원을 찾아 전문의로부터 정식으로 진단받아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다행히도 문제가 없다는 결론이 나올 수도 있고, 때로는 조울증이 아닌 다른 정신 질환으로 진단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만약 조울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면, 전문의와 상담하여 치료를 진행해야 합니다.


조울증이 맞다고 하더라도,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무엇보다 더 늦기 전에 진단받았다는 사실이 다행이고, 바로 지금이 조울증 치료를 시작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시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용기를 내서 조울증을 마주해야 합니다. 조울증은 생각보다 흔한 병입니다. 그러니 이 불행이 왜 하필 왜 나에게 닥쳤을까, 하고 비관적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치료의 방향성만 제대로 잡을 수 있다면, 생각보다 견딜 만한 게 조울증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비관론과 낙관론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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