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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짝 Apr 26. 2024

프롤로그

당신의 주변에 있을지도 모르는 조울증 환자의 이야기

당신이 아는 사람 중 누군가는 조울증을 앓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제가 만 서른 살이었을 때였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정서적으로 심한 흥분 상태가 계속되었습니다. 정체가 의심스러운 인터넷 모임에 나가서 처음 본 사람들과 거리낌없이 어울렸고, 술과 유흥에 돈도 많이 썼습니다. 정상을 벗어난 제 상태는 점점 심해져서 통제불능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저는 그런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스스로도 너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결국 정신과가 있는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여러 가지 질문을 했는데, 제가 질문에 대답할 때마다 표정이 좋지 않았습니다. 잠시 후,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즉시 입원이 필요해 보인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당시 의사 선생님의 질문은 조울증(양극성 장애)[1]에 관한 진단 항목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제 대답 대부분이 진단 기준에 들어맞았던 겁니다. 이때 저는 입원이 필요할 만큼 이미 꽤 심한 조증 상태였습니다.


다음날 처음으로 정신과 병동에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입원 전후로 여러가지 검사를 거쳐 확정적으로 조울증 진단을 받았습니다. ‘정신병’ 환자라고 공식 인증을 받은 셈인데도, 심각한 기분이 들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조증 때문에 기분이 너무 들뜬 상태여서 그랬던 듯합니다.


입원한 뒤에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조울증이 나타난 것은 이 때가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여러가지 검사 과정 중에 저의 과거 기억을 자세히 되짚어 보니, 아마도 고등학교 1학년 무렵부터 조울증이 처음 시작되었고, 중간에 여러 차례 조증과 우울증을 겪어 왔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최초 발병 후 대략 15년이나 지나서야 그동안 조울증을 앓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셈입니다.


그런데 제 케이스처럼 진단이 많이 늦어지는 일이 드물지 않다고 합니다. 조울증 발병 후 진단까지 평균 10년 걸린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진단이 늦어지고 조울증을 방치하는 기간이 길어지게 되면, 조증과 우울증이 반복적으로 재발합니다. 그리고 여러 번 재발을 겪을수록 이 병을 치료하고 관리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집니다. 전문가들은 최초 발병했을 때를 조울증 진단의 골든 타임으로 보기도 하는데, 이때 정확한 진단과 적절한 치료를 받으면 완치될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진다고 합니다. 반면 병을 방치해 재발이 많이 반복될수록 완치는 거의 힘들어지는 것 같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 비해 요즘에는 정신 건강이나 정신 질환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무척 높아진 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울증이란 병에 관해서는 잘못 알고 있거나 혹은 자신과는 상관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관심을 두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정작 자신의 가족 중에 조울증 환자가 생겼는데도 증상이 심해질 때까지 모르고 있다가 치료 시기를 놓치는 일이 흔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정신과 병원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치료받기를 주저하는 일도 많이 있습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조울증 환자들 중에 진단과 치료의 골든 타임을 놓치지 않는 경우가 오히려 운이 좋은 쪽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렇지 못한 많은 환자들은 평생 약을 먹으며 조울증을 관리해야 하고, 때때로 재발에 따르는 고통도 견뎌야 합니다.


문제는 조울증 증상이 최초이거나 또는 재발한 경우, 조증과 우울증은 환자 당사자와 가족을 포함한 주변인에게 파괴적인 결과를 남긴다는 점입니다.


우울기에는 일상 생활을 영위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기력해지고 기분도 심하게 가라앉습니다. 자해나 자살의 위험이 높아지기도 합니다. 이런 기분 때문에 조울증 당사자는 조증기보다 우울기를 더 고통스럽게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환자의 가족 입장에서는 무척 답답하기는 해도 당사자로부터 직접 받는 고통은 적을 수 있습니다(얌전해 지니까).


반면에 조증은 양극성 장애의 주요 특징으로 여겨지곤 하는데, 아마도 조증일때 보이는 극적인 증상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잠을 아주 적게 자고도 피곤을 느끼지 못하며, 말과 생각이 지나치게 빨라집니다. 충동적인 소비를 하기 쉽고, 성욕이 과도해져 문란한 성생활을 하는 것도 자주 있는 패턴입니다. 조증 증상이 더 깊어지면 망상 사고를 하거나 지나친 폭력성을 보이기도 합니다. 이 정도로 조증이 심해지면 평범한 사람이 보기에는 제정신으로는 보이지 않는 말과 행동도 하기 때문에, 이전 모습을 알고 있는 가까운 사람으로서는 특히 당혹스러울 수 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이미 병에 대해 알고 있는 가족 입장에서도 이해하거나 감당하기 힘들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든 간신히 조증의 파도가 지나가고 난 뒤에는 경제적인 손실, 인간관계 파탄 등의 상처가 남기 십상입니다. 심지어 조울증 당사자와 가족 사이에도 서로 많은 상처를 주고받았을 것입니다.


조증이 가라앉고 난 후, 조울증 환자 본인은 이미 벌어진 일들에 대한 기억 때문에 괴롭습니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당사자 자신이 벌인 일을 대체로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민망하고 말도 안 되는 행동이 떠올라, 흔히 말하는 ‘이불킥’을 수도 없이 하게 됩니다. (망할 놈의) 병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조증 상태였던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도 납득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이 사태를 어디서부터 수습해야 할 지 감도 잡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그런 기억이 나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기도 합니다. 이 때 느끼는 괴로운 후회와 자괴감은, 조증 이후에 따라오는 우울증의 한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이런 조증과 우울증의 증상들 중 많은 부분을 저도 경험했습니다. 조울증을 본격적으로 치료하기 시작한 이후로도 조증과 우울증의 파도를 아주 많이 겪었고, 그 때마다 심각한 내상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상처를 받은 것은 저 뿐만이 아닙니다. 저와 가장 가까운 가족들도 함께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이 글을 쓰게 된 첫 번째 이유는 당사자와 가까운 사람들, 특히 가족들을 위해서였습니다. 조울증 당사자의 가족들께 당사자가 느끼는 심정과 경험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싶었습니다. 이 글이 당사자의 가족들의 마음 속에 남아있는 상처와 오해를 푸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글을 쓰게 된 두 번째 동기는 저와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고 계실 조울증 당사자들을 위해서입니다. 조증기에 있었던 기억은 본인이 잊으려고 노력해도, 주변 사람들이 언급하지 않아도, 쉽게 지워지지 않습니다. 강렬한 감정과 과격한 사건이 얽혀 있는 기억이기 때문입니다. 겨우 잊고 지내다가도 문득 조증기의 기억이 스스로를 괴롭힐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일어난 게 분명한 사실이고 잊을 수도 없다면, 조금 뻔뻔하더라도 '정신 승리'의 형식을 취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정신 승리를 하는 쉬운 방법은 적당한 핑계를 찾는 것입니다. 이 글에서 조울증 당사자들이 써먹을 수 있는 여러가지 핑계거리를 전해드려 보고자 합니다. '내 잘못이 아니야'라는 핑계가 아닌, 조울증 당사자들이 스스로를 너무 괴롭히지 않게 하는 데 도움이 되는 ‘설명’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를 통해서 조울증 증상을 더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된다면 이 병을 관리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을 쓰게 된 세 번째 이유는, 조울증 당사자나 가족이 아니더라도 조울증에 관심을 갖는 분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 때문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이 글의 가장 중요한 쓸모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조울증 환자가 우리 사회 구성원의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벼운 수준의 양극성 기분조절 장애를 포함한 국내 양극성 장애 스펙트럼 유병률은 4.3% 수준으로[2], 의외로 높습니다. 조울증과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는 독자분께서 아는 사람 중에도 조울증을 경험하는 환자가 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는 뜻입니다. 조울증에 관한 지식이 있는 분들이 많아질수록, 주위에 도움이나 치료가 필요한 경우를 발견했을 때, 더 빨리 알아채고 조치를 취할 가능성도 높아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조울증은 첫 번째 발병 때 진단하고 치료하는 것이 무척 중요하기 때문에, 주변에 이 병의 신호를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많다면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만일 지인이나 가족이 조울증으로 진단받는 경우, 적절하게 대처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양극성 장애의 증상으로 나타나는 조울증은 평범한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곤란한 면이 많습니다. 조울증 환자의 행동, 그리고 마음을 이해한다는 것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토끼를 쫓아가는 과정처럼 엉뚱하고도 종잡을 수 없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앞으로 연재할 글에는 여러가지 비유와 예시를 사용할 것입니다. 다만 이런 설명(핑계)들이 간혹 과학적으로 엄밀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은 감안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까닭은 무엇보다 저의 짧은 지식 탓도 있지만, 조울증에 관해 밝혀지지 않은 점이 아직도 아주 많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 글은 조울증의 ‘분석’보다는 ‘납득’에 방향성을 두고 있습니다. 앞으로 이어질 글이 조울증이라는 이상한 존재를 찾아가는 길에 쓸만한 안내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1] 엄밀히 말해서, 흔히 알려져 있는 ‘조울증’이란 말은 병의 증상이지 병명이 아닙니다. 공식적으로 많이 쓰이는 병명은 ‘양극성 장애’입니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일반에 더 친숙한 표현인 ‘조울증’을 주로 사용하기로 하겠습니다.


[2] 2016. 김지현 등, https://doi.org/10.1016/j.jad.2016.06.017

Lifetime prevalence, sociodemographic correlates, and diagnostic overlaps of bipolar spectrum disorder in the general population of South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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