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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짝 May 03. 2024

지킬 박사와 하이드

당신의 주변에 있을지도 모르는 조울증 환자의 이야기


이야기 하나


2학기가 되어서도 K군의 과도한 열기는 식을 낌새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학기 중반쯤에 이르자 갑자기 그 양상이 달라지기까지 합니다. 에너지는 더욱더 차고 넘치는 느낌인데, 정신이 지나치게 산만해져서 공부에 집중하기가 어렵습니다. 대신 이전에는 별로 관심이 없던 정치나 사회 문제에 대한 비판적 생각들을 많이 하게 되었고,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기 위해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은 맥락을 잃은 채, 이 주제에서 저 주제로 쉴 새 없이 뛰어다닙니다. 게다가 K군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혼자 되새기는 데에서 멈추지 않고, 주위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말하지 않고는 못 배깁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주변인들도 지쳐서, 차츰 그의 말을 무시하는 일이 많아집니다.


또 꼭 필요하지 않은 전자제품에 꽂혀 수시로 인터넷 쇼핑 사이트를 검색합니다. 주로 핸드폰 액세서리, 컴퓨터 주변기기 등 평소에도 관심을 갖고 좋아하던 물건들이긴 합니다. 하지만 전에는 합리적으로 잘 따져 보고 구매했다면, 요즘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택배 상자가 올 정도로 지나치게 주문이 많아졌습니다. 부모님께서도 배송되는 물품이 너무 많으니까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실 정도입니다. K군이 사들이는 품목들을 살펴보면, 남들이 보기에는 별 필요가 없을 것 같은 물건이 많습니다. 그렇게 온라인 쇼핑을 할 당시에는 꼭 사야만 할 것 같아 주문했음에도 정작 제품이 도착하면 몇 번 사용해보지도 않고 금세 흥미를 잃습니다.


한편 길에서 지나치는 여성들을 보면 엉큼한 생각을 넘어 과하다 싶은 성욕을 느낄 때도 많습니다. 쫓아가서 말을 걸어 보려는 충동을 느꼈다가 그만두기가 여러 번입니다. K군의 원래 성격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다가 문득 K군은 자기가 이상해졌다고 느끼기 시작합니다. 보통 조울증 환자가 자기 스스로 이상 상태를 자각하기는 어려운데, 평소 예민한 성격이었던 K군은 이런 위화감을 운 좋게 눈치챈 겁니다. 그래서 가장 친한 친구에게 지나가는 말처럼 물어봅니다. '요즘 나 좀 이상해 보여?' K군과 오래 알고 지냈고 그의 좋은 조언자이기도 한 이 친구는 그 고민을 그냥 흘려듣지 않습니다. 친구의 친척 중에서 K군과 비슷한 경우를 본 적이 있었기에, 최근에 K군을 유심히 지켜보았기 때문입니다. 친구는 조심스럽게 정신건강의학과 전문 병원에 한 번 가 보라고 권합니다. 그를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K군은, 친구가 아무렇게나 하는 말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정신 병원이라고?’라며 놀란 것도 사실이지만, 친구 관점에서 심각해 보일 정도면 정말로 심각한 게 맞다고 느껴져 그의 말을 받아들입니다. 그리하여 K군은 난생처음 정신과 병원에 갈 마음을 먹습니다.


정신 병원 문턱을 넘는 일은 K군에게 있어 일종의 도전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것도 새로운 경험일 뿐이야. 멀쩡하다고 확인받고 돌아오면 되지, 뭐,’ 하고 애써 생각합니다. 하지만 K군의 바람과는 달리,  진료실에서 마주 앉은 담당의는 최대한 빨리 입원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말합니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K군의 진단 결과를 보니 '조울증이 거의 확실하며, 그것도 현재 심한 조증 상태로 보인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정신 병원을 방문한 것이 처음인 데다가 자신에게 그 정도로 심각한 문제가 있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던 K군에게, 정신 병동 입원 권고는 비현실적으로 들렸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엉뚱하게도, 조증 상태의 K군은 정신 병원 입원조차도 호기심을 자극하는 색다른 모험 같다고 느낍니다.


집에 돌아와 부모님께 대략적인 사정을 말씀드립니다. 부모님께서는 아들의 말을 들으며 안색이 변하십니다. 다시 병원을 찾은 K군을 보호자로서 같이 온 부모님의 표정은 어둡기만 합니다. 그러나 정작 K군 본인은 '며칠 쉬었다 올게요'라고 말하고는 별다른 거부감 없이 입원 수속을 밟습니다. 그는 입원 전에 큰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었고, 본인 의지로 입원을 결정할 수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폐쇄병동이 아닌 개방병동에 들어가게 됩니다.


K군이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상상했던 것과 정신과 병동의 실제 모습은 많이 달랐습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흔히 보던 암울한 분위기에 맛이 간 듯한 사람들이 비틀거리며 배회하는 그림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K군 스스로도 말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한동안 쉬러 오는 느낌의 환자들이 많아 보입니다. 병동 생활도 특별할 게 없습니다. 식사, 약, 운동, 모임, 특별활동 등은 처음에는 신선했지만 반복되면서 차츰 익숙해지고 일상이 되어 흥미가 떨어집니다. 그래도 다행히 입원과 약물 치료가 K군에게 도움이 되었는지 흥분 상태는 점차 가라앉습니다.


하지만 증상 호전과 별개로 K군은 지루함과 조바심을 느낍니다. 입원하고 여러 날이 지남에 따라 병동 생활은 지나치게 단순하게 느껴지고 자유 시간은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남는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하다가, 책을 읽기로 합니다. 그렇게 입원할 때 들고 들어온 한 권뿐인 책 <지킬 박사와 하이드>를 여러 번 읽게 됩니다. 예전에는 대략적인 내용만 주워들은 정도였는데, 이 소설을 문고판으로 읽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K군이 소설을 반복해서 읽은 까닭은 그 내용이 남 일 같지가 않아서입니다. 기분이 안정되어 가면서 예전처럼 돌아온 것 같은 자신의 모습과, 입원하기 직전 조증 상태였던 모습이 너무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소설에서 지킬 박사와 하이드가 양쪽을 오가며 변신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느낍니다. 자기 안에도 두 명의 인격이 있는 것 같습니다. K군은 생각합니다. ‘도대체 지킬과 하이드 중 어느 쪽이 진짜 내 성격일까? 조울증이란 게 혹시 이중인격 같은 건가'?’




조증일 때와 아닐 때, 어느 것이 진짜 모습일까


K군의 고민이 아주 엉뚱하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소설 <지킬 박사와 하이드>에서 주인공이 보여주는 두 가지 인격이 극단적으로 다른 것처럼, 조울증 당사자가 조증일 때와 우울증일 때의 모습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조울증 당사자들은 이렇게 큰 폭의 기분 변화를 경험하게 되고, 그 결과 자신의 정체성을 두고 심각한 고민에 빠집니다.


조증과 우울증, 그리고 안정된 상태를 모두 경험한 조울증 당사자들이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로 괴로워하다가 내리는 결론은 주로 둘 중 하나입니다. 첫째는 조증과 우울증 사이 어디쯤을 자신의 성격으로 정의하려는 경우입니다. 둘째로 우울증, 조증, 평범한 모습을 모두 포함한 것이 자신의 모습이라고 총합적으로 결론을 내리기도 합니다. 전자와 후자 중 어느 하나가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각자의 판단에 따라 자신의 진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라면 둘 다 답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초보 조울증 환자인 K군이 느끼는 정체성 혼란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입니다. 아직 심각한 우울증은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양 극단의 다른 한쪽은 알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앞으로 겪게 될 우울증까지 더해지면, 정체성에 관한 생각은 더 크게 흔들릴 가능성이 높습니다.


조울증 당사자의 정체감이 크게 달라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공통적인 기억이 변화의 양 극단을 관통합니다. 이 점은 <지킬 박사와 하이드>의 변신에서 성격과 모습은 달라지지만 기억은 공유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처럼 소설은 조울증에 관한 비유로 생각해 볼 만한 여지가 많은 글입니다. 조울증의 극단적인 측면을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공식적으로는 조울증을 주로 양극성 장애(Bipolar disorder)라고 부르는데, 이 명칭에서도 같은 맥락을 엿볼 수 있습니다.


반복되는 이야기이지만, 소설 <지킬 박사와 하이드>에 등장하는 주인공을 이번 에피소드에 나타난 K군에 대응해 본다면, 평범한 상태에 있는 K군을 지킬 박사로, 조증 상태의 K군은 하이드로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하이드라는 부도덕하고 광기와 분노에 찬 인물 자체는 지킬 박사의 발명품이 아닙니다. 단지 박사는 특별한 약을 조제했고, 그것을 마시면 평소 내면 깊숙이 가두어 두었던 하이드로 변신할 뿐입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 하이드 역시 박사 자신이 원래 가지고 있던 모습의 일부입니다. 조증 상태에 있는 K군을 하이드에 비유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조증이 심해지면서 자기 통제와 객관적인 판단이 어렵게 되었고, 평소에 갇혀 있던 K군의 어두운 면들이 그야말로 대방출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감정을 잘 조절하지 못하게 되고, 비합리적이거나 무례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며, 과도한 지출을 일삼고, 성적인 충동을 강하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K군이 겪었던 이러한 문제들은, 근본적으로는 뇌신경계에 이상이 생겨서 통제와 조절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인데, 이에 대해선 이후에 다루겠습니다.


한편 K군의 변화를 주변에서 직접 겪는 사람들, 특히 가족들은 무척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얌전했던 K군이 자신들이 알던 것과 전혀 다르게 행동하는 모습을 보면, ‘내가 알던  K 맞아?’라며 납득하지 못할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경우 주변 사람들은 이런 조울증 환자에게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고 내버려 둡니다. 어떻게 해야   몰라서, 어이없고 황당해서, 혹은 화가 나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조울증 환자를 방치하면 상황은 더욱 악화됩니다. 그러나 만약 조증의 폭발적인 과잉 행동을 처음 맞닥뜨리고도 침착하고 적절하게 조치할  있다면 좋겠지만, 그게 오히려 비정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대단하다고 말해야 할까요? 그나마 K군에게 좋은 조언자 친구가 있었다는 점은 정말 다행이었습니다. 평소 눈썰미가 좋았던 조언자 친구는 K군의 변화를 예민하게 감지했고, 병원에  보라고 분명하게 말해 주었습니다.  덕분에 K군은 조증이 정말 심각해지기 전에 진단과 치료를 받을  있었습니다. 이처럼 조울증 당사자의 기분 변화를 알아채려면 가족이나 가까운 지인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조울증 당사자는 자신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알기 어렵습니다. 둘째조증으로 들뜨는 과정은 점진적이기 때문에,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이 아니면 초기에 변화를 인지하기가 어렵습니다. 셋째, 조증의  단계에서 거쳐가게 되는 ‘경조증[1]상태 역시당사자를 오랫동안 알던 사람이 아니면 이것이 조울증 증상  하나라는 것을 알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경조증 상태에 있는 조울증 환자는 본래부터 성격이 적극적이고 쾌활하며 열정적인 사람으로 오해받기  좋은 모습을 보이곤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경조증 수준의 기분 변화는 대개 가족이나 오랜 지인쯤 돼야 눈치챌 정도인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조울증에 관해 미리 알고 있는 사람이 봐야지 ‘ 사람 평소와 다른데? 조증 아닌가?’ 하고 의심해  한 수준입니다.


만약 K군이 친구의 조언을 무시해서 병원에 가지 않고 그대로 지냈으면, 정말 문자 그대로 소설 속의 하이드처럼 변했을지도 모릅니다. 증상이 아주 심해져 급성기 조증[2] 되면, 생각과 말 그리고 행동이 공격적으로 변할  있기 때문입니다. 파괴적 행동이 환자 스스로에게 향한 결과는 무분별한 소비, 모험적인 사업 실행, 문란한 성생활 등의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특히 변화의 방향이 폭력성을 이는 쪽이라면 상황이  심각해집니다. 폭력의 대상은 가깝게는 가족, 멀게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  수도 있습니다. 이럴 때에는 기본적으로 분노 조절도 안 되는 터라 누구와도 시비가 붙을  있습니다.


보통 이쯤 되어서야 뭔가 단단히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주변 사람들도 깨닫습니다. K군처럼 제때 도움을 받는 경우는 오히려 상당히 드문 축에 속합니다. 조증이 심해진 뒤에라도, 조울증 환자와 가족이 병원을 찾아 입원 등 적절한 대응을 하고, 또 치료와 관리를 잘해 나간다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하지만 환자가 심한 조증 상태까지 이르면 입원 과정도 상당히 불편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기 십상입니다. 환자가 입원을 거부하면 행정입원이나 보호입원 같은 강제입원 절차를 거쳐야 할 수도 있는데, 자해나 타해 등의 위험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 역시 쉽지 않습니다. 최악의 경우는 환자가 입원과 외래 진료를 모두 거부하는 상황입니다. ‘내가 정신병원을 왜 가? 나 안 미쳤어!’라는 식의 반응에 손 쓸 방법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면 가족들은 속절없이 조증의 폭풍이 잦아들 때까지 괴로운 시간을 견뎌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야 다들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 다시금 환자가 병원에 가도록 설득하게 됩니다.


다시 소설 이야기로 돌아와서, 지킬 박사는 하이드에서 자신으로 돌아오게 하는 약이 떨어져 가고 있음절망하는 내용의 편지를 친구에게 남깁니다. 그는 하이드에게 몸을 영영 빼앗겨 지킬 박사로 돌아올  없게  것을 두려워합니다. 지킬 박사로 돌아오게 만드는 약에 대응할 만한 것이 현실에서는 조울증 치료 약물입니다. 지킬 박사의 약과 달리 조울증 약물은 다양하게 개발되어 있으며, 증상에 따라 병원에서 처방받을  습니다. 많은 조울증 치료 약물  특정 환자에게  맞는 약을 찾는 과정쉽지는 않지만, 기본적으로 약물 치료는 아주 중요합니다. 조울증이란 병은 잠잠하다가도 불시에 재발할  있기 때문입니다. 환자가 의사와 상의하지 않고 임의로 약을 끊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랬다가는 내면의 하이드가 언제 다시 깨어날지 모를 일입니다.


이것은 K군에게도 해당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는 자신이 조울증의 위험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아니며, 최악의 상황을 간신히   피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지금은 입원해서 병동 안에 자신이 격리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자신으로부터 조울증에 영향을 미치는 외부 요인들을 격리한 상태라는 것, 그래서 입원 병동이 그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조만간 퇴원해서 세상으로 다시 나가야 합니다. K군에게 조울증의 파도는 이제  시작되었을 뿐입니다.



      

[1] 비교적 증상이 가벼운 조증을 말합니다. 이 시기에는 창의력이나 생산성이 좋아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2] 양극성 장애 당사자 커뮤니티에서는 ‘극조증’이란 용어를 많이 사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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