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특히 바울 서신서에 등장하는 '믿음'인 피스티스(πίστις)는 영어로는 faith, 우리말로 신실함, 충성으로 번역할 수 있다.
신학자들은 피스티스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 지적 확신, 2) 인격적 신뢰, 3) 신실함, 충성
그리스도를 믿음인가? 그리스도의 신실함인가?
20세기 후반 바울 신학계의 주요 논쟁 중 하나인 ‘피스티스 크리스투(π́ιστις Χριστου̑)' 논쟁은 이 헬라어 문구를 '그리스도를 믿음(목적격)' vs '그리스도의신실함(주격)'으로 번역할 것인지에 대한 것이다.
전자(목적격)의 해석이 기존의 보편적 해석인데 일견 현학적 논쟁으로 비칠 수도 있지만, 다음 성경 구절을 보면 시선이 달라진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이 구절을 '주격'으로 해석하면 바울은 자신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안에 산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실함(충성됨) 안에 산다는 고백을 한 것이다.
더 이상의 신학적 설명은 생략한다. 인터넷으로 '피스티스 크리스투'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바울 신학자들이 설명하는 논쟁의 면면을 알 수 있다.
변호사를 하면서(사실 그전부터), 소위 '믿음 좋다'는 사람들의 이면(裏面)을 보았다.
목사인 자신의 남편이 전도사랑 바람났다고 상담한 사모님(예전에도 청년이랑 바람 폈는데 용서한 적이 있다면서, 눈에 허옇게 소금기가 보일 정도로 많이 울었다),
교회를 사리사욕의 수단으로 여기는 직분자들,
교회 안팎의 모습이 전혀 다른 늑대인간류(영화 속에 나오는 늑대인간처럼 물리면 전염성도 있는 것 같다) 등등 일일이 헤아리기 어렵다.
하지만, 이렇게 누가 봐도 덕스럽지 않은 일을 저지르는 이들보다, 하향곡선을 그리는 내 믿음을 수직낙하시키고 혼란을 가중시키는 이들은 따로 있다.
이들은 정도에 차이는 있을지언정 기도와 성경 읽기, 전도, 헌금, 봉사를 비롯해 교회의 롤모델로 부족함이 없을 정도의 모습을 보인다.
이들의 공통점은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이는 다른 이에 대한 우월감과 맞닿아 있다. 말하자면 '현대판 바리새인'인 셈인데 이들은 그리스도를 믿지만(스스로 그렇게 생각하지만), 그리스도의 신실함 안에는 거하지 않는 것 같다.
바리새파 사람은 서서, 혼자 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남의 것을 빼앗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와 같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며, 더구나 이 세리와는 같지 않습니다.'(눅18:11)
예수님은 우리 믿음의 '대상'이자, 믿음의 '모델'이다. 노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 방주 안에 거하여 구원을 얻은 것처럼 나도 예수님의 신실함 안에 거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를 닮길 원하지만, 애초 불가능한 목표라는 불경스러운 의심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불의를 당해 주고, 알면서도 속아 주고, 불명예를 뒤집어쓰는 일은 내가 죽어야만 가능하다는데, 오히려 하루 중 수시로 바리새인과 세리의 자리를 오가는 스스로를 보며 절망한다.
그러니 어찌하랴? 예수님이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마16:24) 말씀하셨으니, 죽지는 않더라도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겠다. 흉내라도 내면 나를 불쌍히 여기시겠지.
예수, 우리 믿음의 창시자 그리고 완성자
(the author and perfecterof our faith)
우리도 갖가지 무거운 짐과 얽매는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 앞에 놓인 달음질을 참으면서 달려갑시다.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봅시다.
그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내다보고서,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자기에 대한 죄인들의 이러한 반항을 참아내신 분을 생각하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은 낙심하여 지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히12:1b~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