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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관찰 0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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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하루 Jan 25. 2024

나의 여행은


언젠가 보았던 시가 떠오른다.

박경리 작가의 <여행>.




나는 거의 여행을 하지 않았다.

피치 못할 일로 외출해야 할 때도 그 전날부터

어수선하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어릴 적에는 나다니기를 싫어한 나를 구멍지기라 하며

어머니는 꾸중했다. 바깥세상이 두려웠는지

낯설어서 그랬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나도 남 못지않은 나그네였다.

내 방식대로 진종일 대부분의 시간 혼자서 여행을 했다.

꿈속에서도 여행을 했고 서산 바라보면서도

여행을 했고 나무의 가지치기를 하면서도, 서억서억

톱이 움직이며 나무의 살갗이 찢기는 것을,

그럴 때도 여행을 했고 밭을 맬 때도

설거지를 할 때도 여행을 했다.


기차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혹은 배를 타고

그런 여행은 아니었지만

눈으로 보고 피부를 느끼는 그런 여행은 아니었지만

보다 은밀하게 내면으로 내면으로

촘촘하고 섬세했으며

다양하고 풍성했다.


행선지도 있었고 귀착지도 있었다.

바이칼 호수도 있었으며 밤하늘의 별이 크다는

사하라 사막, 작가이기도 했던 어떤 여자가

사막을 건너면서 신의 계시를 받아

메테르니히와 러시아 황제 사이를 오가며

신성 동맹을 주선했다는 사연이 있는

그 별이 큰 사막의 밤하늘


히말라야의 짐 진 노새와 야크의 슬픈 풍경

마음의 여행이든 현실의 여행이든

사라졌다간 되돌아오기도 하는 기억의 눈보라

안개이며 구름이며 몽환이긴 매일반

다만 내 글 모두가 정처 없는 그 여행기

여행의 기록일 것이다.


박경리  <여행>




나의 여행도 그렇다.


현실에서는 13년 전 일본에 한 번 다녀온 게 전부이지만.

내면으로 내면으로.

꿈속에서, 상상에서 나는 어디든 날아갔다.


그 옛날 고려로 가기도 하고, 싱가포르의 사자상 앞에서 운명의 그를 만나기도 했다.


우주를 날아 달에도, 이름 모를 소행성에도 가보고 시간을 거슬러 나의 과거로 나의 왜곡된 기억 저편으로 저편으로...


마음의 여행이 있었기에 나의 글이 있는 건지 모른다.


한편으로는 이렇기도 하다.


여행은 엄두도 못 냈을 적에는 누군가가 여행 경험을 물으면 주눅 들고, 나의 가난이 나를 대변하는 것만 같아 서글펐다.


여행을 갈 수 있는 정도의 돈을 모았을 적에는 여행에 몇 십만 원, 몇 백만 원 쓰는 게 무척 아까웠다.


그러면서도 누군가 홍콩에 가본 적 있는지 묻거나 터키에서는 열기구를 꼭 타보라든지, 베르사유의 궁전, 파리의 에펠탑은 잊을 수 없다든지, 사이판의 바다의 짙푸른 컬러가 매혹적이라든지.


이런 말을 하며 나를 쳐다보면, 순간 말문이 막힌다.


나는 여전히 내 인생이 서글픈 것일까.

여행의 가치를 모르기에 돈과 시간을 들이는 게 아까운걸까.

아니 사실은 가보고 싶은 걸까.


살아온 날들을, 지금의 당신을 처량하게만 보지 말길.


마음의 여행이든 현실의 여행이든 사라졌다가 되돌아오기도 하는 몽환이긴 매일반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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