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하루 행복한 날을 보내겠다는 노력
성인이 된 이후부터 말버릇이 하나 생겼다.
“아 학생 때로 돌아가고 싶다.”
아마 20살 이상인 사람들이라면 한 번씩은 해본 말이 아닐까 싶다. 과거 학생 때의 나는 뭐가 그렇게 힘들었는지 항상 투덜대며 학교를 등교하던 기억을 갖고 있다. 50분짜리 한 교시 수업이 어찌나 길게 느껴지는지 매번 졸기 일쑤에 야자 하기 싫어서 도망 나가던 내가 생각난다.
그땐 그냥 모든 게 싫었다. 하루를 학교에서 모두 보내야 하는 상황도, 정해진 것만 먹어야 하는 급식도, 억압받는다고 생각했던 수많은 규칙들까지 심지어 선생님이 나에게 피해를 준 것도 아닌데 그냥 싫었다. 사실 돌아보면 다 나에게 좋은 것들만 가르쳐줬는데 말이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내가 정말 별것도 아닌 거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구나 싶었다. 아무것도 아니면서 뭐가 그렇게 날 화나게 한다고 투덜대었을까? 더 웃긴 건 내 하루를 힘들게 만들던 그런 것들이 지금은 그리움의 대상이고 향수가 되었다. 수업시간에 들리는 지루한 선생님의 목소리, 칠판과 분필이 부딪히는 맑고 둔탁한 소리. 야자시간 숨 막히는 정막 속에 필기하는 소리, 쓱쓱쓱……. 쉬는 시간마다 학생들이 몰래 피워 어디선가 스몰 스몰 퍼지는 담배냄새까지도 지금은 너무나 그립다.
과거에 힘들었던 것이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게 느껴지는 게 어쩐지 자연스럽다. 힘든 삶을 살고 있는 누군가에게 던지는 위로의 한마디가 정말로 우리의 삶에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괜찮아, 이미 지나간 일이야. 나중에 가면 그거 별거 아니다?”
오히려 그때만큼 걱정 없이 살았던 적이 있을까 생각하며 그리움이 돋는다. 큰 꿈을 갖고 있던 것도 아니고 확실한 미래를 바라보고 있던 것도 아니다. 그저 하루를 기분 좋게 보내기를 바라고 하루에 충실했던 것 같다.
그 시절이 왜 계속 나를 향수에 젖게 만드는 것일까. 정말 힘들다고 생각한 것이 훗날 별거 아니게 된 이유는 사실 정말 힘든 일이 아니었다는 것일까. 가끔 친구들과 과거를 그리며 타임머신을 타곤 하는데 그때마다 항상 결론은 다른 쪽으로 난다. “순수하게 학창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에서 “돌아간다면 나는 oo을 할 거다”로 변형되어서 마무리된다.
우리가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는 것은 과거에 놓친 실수를 바로잡고 싶은 마음이나 그때 제대로 느끼지 못한 자유로움을 더 깊이 음미하고 싶다는 마음. 결국 지금의 모습의 상황이 만족스럽지 못함에 나오는 생각이었다. 지금은 사회의 한 부품이 되었고 현실의 채찍을 받으며 억지로 일을 하는 노동자가 되었지만 어릴 적으로 돌아간다면 그때 더 크게 품지 못했던 꿈을 더 크게 꿀 수 있지 않겠냐며 탄식을 뱉는다.
꿈이라는 이상은 항상 거창하고 화려해야 한다는 생각에 나는 거절을 표시한다. 우리가 꿈을 꾸는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행복이다. 우리는 행복을 추구하며 보다 더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꿈을 꾼다. 언제부턴가 이 기준을 좌지우지하는 결정적인 요소가 돈과 명예로 와전되었다. 물론 있으면 좋고 없으면 현실이 불편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행복을 결정하는 결정권이 될 수는 없다.
행복추구권, 결정권은 모두 나 자신이 들고 있다. 내가 정한 기준에 만족한다면 비로써 원하는 행복이 되는 것이지 남들의 시선에 지어진 기준이 나를 만족시키진 못한다. 꿈은 애들만 꾼다고 생각하는가?
별거 아니다. 하루를 행복하게 보내자는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다 보면 그것이 곧 꿈이고 꿈은 현실이 될 수 있다. 지금 힘이 든다면 조금만 생각을 틀어보면 된다. 훗날 우리가 늙어 은퇴를 할 나이가 되어 돌아보면, 청년 때가 좋았고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며 그리워하는 모습일 것이니까.
“그땐 진짜 좋았는데.”
우리 인생에 좋지 않았던 순간은 없었다.
그저 하루를 행복하게 보내겠다는 마음으로도 우린 꿈을 꿀 수 있었던 거야.
-어린 왕자와의 일주일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