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학 Jul 21. 2019

사진에 담는 것들

이미 '사진'이라는 타임머신이 존재했다

집을 이사하던 날, 개인 물품들을 하나 둘 꺼내어 정리를 하던 도중 평소 사용하지 않던 책상 서랍이 눈에 들어왔다. 기왕에 정리를 시작했으니 깔끔하게 안 쓰는 물건들은 전부 내다버릴 생각으로 서랍을 열었더니 작은 상자가 하나 나왔다. 습기를 조금 먹은 걸로 보아 책상 속에서 꽤나 오랜 시간동안 묵혀있었던 것 얼핏 보기만 해도 직감할 수 있었다. 언제 저런 상자를 넣었는지, 안에는 어떤 물건들이 들어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긴장과 호기심에 괜스레 심장이 콩닥거리던 나는 더는 망설이지 않고 상자를 열었다.


상자 속 물건은 다름아닌 사진이었다. 학창시절에 찍고 인화된 사진들이 시간과 무관하게 무작위로 담겨있었다. 앨범으로 만드는 작업이 너무 귀찮아서 작은 상자 하나 구해다가 쑤셔 넣어서 보관했던 것으로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몇 장 되지 않는 사진들이지만 초등학생 때부터 성인이 되기 전까지의 이렇다한 순간들의 대부분은 남겨져있었다. 하루 종일 짐 옮기느라 고생했던 몸도 잠시 쉴 겸, 지친 다리의 긴장을 풀어 바닥에 주저앉아 사진들을 천천히 꺼내 보았다.


운동회, 소풍, 수련회, 수학여행, 체력장과 같은 특별한날에 찍은 사진들. 교실에서 친구들과 장난치는 사진이나 스승의 날 열심히 준비했던 파티사진처럼 소소하게 지나갔던 순간들을 담은 사진들이 모여 마음을 몽글몽글하게 만들었다.


그저 사진 한 장을 보았을 뿐인데 마음속에는 표현할 수 없는 수많은 감정들이 소용돌이쳤다. 사진을 찍던 바로 그 순간이 머릿속에 스친 것이 아니라 그때 그 시절의 상황들이 천천히 그려졌고, 그려지는 선에 따라서 은은하게 당시 느꼈던 감정들의 향수가 퍼졌다. 사진은 그날로 나를 데려다 주었다. 그토록 만들고 싶어 하는 타임머신은 사실 사진기가 만들어짐과 동시에 발명된 것일지도 모른다.


제주도 수학여행에서 찍은 단체사진에서는 마라도 짜장면냄새가 나는 것만 같았고, 늦은 저녁 숙소 로비에서 짝사랑하던 여자 아이에게 귤 초콜릿을 선물하며 고백하던 추억이 함께 떠올랐다. 대차게 차였던 기억까지 나는 바람에 괜히 혼자 얼굴을 붉혀버렸다. 체육대회 달리기 사진을 통해서 1등을 향해 질주하던 뜨거운 뜀박질과 함께 심장이 다시금 뛰는 기분이었다. 학급 반장의 어머니께서 점심으로 햄버거를 돌려 맛있게 먹었던 기억도 떠올랐다.


사진이란 것이, 그 순간만을 담기 위한 도구라고 하지만 사실은 보다 더 많은 것을 안에 담을 수 있었다. 추억은 물론이고 감정들까지 형태에 구애받지 않는 어떠한 것들도 모두 담을 수 있었다. 사진(photograph)은 빛과 그리다라는 동사의 합성어로 쉽게 ‘빛으로 그리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여기서 빛은 모델을 뜻하지만 그것이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정해놓은 틀이 있는 것이 아니다. 빛이 형태를 갖고 있지 않듯이 우리가 담을 사진 속의 모델은 무궁무진 하다는 이야기다. 


이날부터 나는 평소 느끼는 사소한 것들도 사진으로 남기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그대와 함께 맞이하는 모든 순간들이 소중할 뿐만 아니라 다시는 오지 않을 시간이란 것을 알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 느끼는 이 감정들은 어떠한 것들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자 나를 만들어주는 가장 큰 원동력이 되기에 사진으로 꼭꼭 눌러 담아 간직하고 싶다.


추억은 일종의 만남이다.
 -칼릴 지브란-


이전 26화 삶의 원천, 간절함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