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30. 그 속의 환희와 비애
'분투하고 추구하고 발견하며 결코 굴복하지 않으리니' - 앨프레드 테니슨, 율리시즈 中
2019.11.12 (08:00) Triacastela - Sarria (16:30) (24km)
새벽부터 몸이 으슬거리기 시작했다. 찬바람 부는 겨울날씨 때문에 그런 줄 알았더니 기어코 열이 오르기 시작했고 비상용으로 챙겨 온 약을 먹어도 계속해서 미열이 있었다. 이불을 있는 힘껏 끌어당기고 부어오른 목구멍을 달래며 연신 끙끙대며 뒤척거리는 와중에도 Tim은 못다 나눈 이야기가 아직 많은지 잠꼬대로도 계속해서 이야기를 했다. 불도에서는 심신일여(心神一如)랬고 고대 로마에서는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고 했던가. 아침부터 속도가 나질 않았고 아무리 차근히 호흡을 한대도 숨을 쉴 때마다 버거웠다. 가히, 최고라면 최고로 힘들었던 하루. 이에 비하면 피레네는 능사라 할 정도였다. 하루종일 비가 내렸고 몸이 무거웠다.
지난밤 유대를 쌓은 순례길의 동무들은 다음 날 으레 한쪽이 짐을 싸거나 똥을 싸거나 하여튼 뭔가를 싸는 문제로 늦는 경우는 기다렸다가 같이 가 주는 등 혼자 출발하는 걸 의리 없다 생각하거나 혼자 걷는 걸 불행하게 여기는 이들이 많았는데 나는 그 반대로 동행이 생길 기회도 부러 피하곤 했다. 그렇다고 어디에서나 혼자이길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으나 다만 걷고 있노라면 혼자인 게 편할 때가 많았고 그걸 즐기는 성격이었다. 그동안을 눈이 머무르고 싶어 하는 곳에 두고 잔뜩 한눈을 팔았으며 얼마간 골똘하고 얼마간 흩어지는 생각들을 내 나름으로 달콤하게 써먹곤 했다. 해서 돌연 혼자 출발하려는 나의 기척을 눈치챈 Tim이 아쉬워하는 눈치였지만 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기침을 얼마간은 부로 토해내며 감기를 옮기기 싫다는 말로 핑계를 대신했다.
길은 산길과 아스팔트, 시골길을 번갈아 반복했다. 경사도 지지 않은 비교적 평평한 길인데도 호흡으로 힘이 채워지지 않으니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10km를 걸어 도착한 Samos에서 토스타다를 먹었다. 이름이야 거창한 토스트 같지만 빵을 뚝 잘라 살짝 구워 그 위에 가염버터를 바르고 딸기잼을 뿌린 것뿐인데도 딱 필요한 만큼 달콤한 맛이 위안이 되어주었다. 그곳에서 조금 더 쉬어갔어야 했나. 남은 15km가 왜인지도 모르게 점점 멀어지기만 했다. 어디서 왔는지도 모를 감정들이 뒤섞여 별안간 슬프고, 억울했고, 화가 치밀었다. 분노란 응당 그 대상이 있어 소리를 질러도 어딘가를 향해야 할 텐데 목적도 없이 치민 나의 부아는 가닿을 곳 없어 허공만 채웠다. 내리는 비와 우거진 수풀 따위의 자연은 책망의 대상이 될 수 없었고 자연스레 신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태어날 때부터 종교를 가지고 태어난 나는 어렸을 때부터 유일신의 존재를 믿었고 그렇기에 응당 섬기고 모시며 살아와야만 했기에 그런 신을 탓한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으나 머리가 크고부터 조금씩 나의 책임을 전가해 따져 묻기 시작했고 언젠가부터는 불평도 조금씩 해왔던 것 같다. 아무리 그런데도 하늘에서 뚝하고 운석이 떨어지거나 마른하늘에 벼락을 맞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었을까, 버릇이 극에 치닫아 오늘따라 어수선한 마음이 유난이었다. 욕을 뱉다가, 짜증을 내다가, 소리를 질렀다. 뭘 어찌해 달라는 것도 아니었고 뭔가를 내놓으라고 하는 것도 아니었고 왜 나를 여기 있게 했느냐고 비난하는 것도 아니었다. 뭘 도대체 어쩌라는 건지 모를 기함을 왁왁 질러댔다. 아무리 뱉어도 듣는 이 하나 없는 것 같아 괜히 눈이 시어지기도 했다. 그러니 마음이 제 자리에 있을 리 만무하고 사나운 정신에 기어코 길을 잘못 들고야 말았다. 자업자득이랄까, 어쩌면 이런 일이 일련의 심판일지도. 발목까지 푹푹 잠겨 몸을 잡아 한없이 아래로 내끄는 진흙길을 20분 동안 헤매다 돌아오니 온몸이 빗물과 진흙에 담겨 만신창이다. 그렇게도 고역스러우면 차를 잡아 타거나 쉬어갈 만도 하련만 미련스러운 성격에 미처 그럴 꾀도 부릴 수가 없었다.
이도 저도 못하는 상황에서 그저 다음 발길로 눈을 옮기며 씩씩대며 걸었다. 그런 복잡다단하고 갈피를 찾기 어려운 감정들 속에 일말의 후회랄 것이 있었을까. 생각해 보니 후회만큼은 없었던 것 같다. 평생을 의지해온 유일신에게 불평과 원망을 맘껏 뱉으면서도 이 길 위에 오른 것을 후회는 않는다니, 참 우습고도 신기한 일이다. 그 사이 이 길이 나에겐 무슨 의미로 자리 잡았길래 모든 순간이 분투임에도 돌아가거나 가로질러 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일까.
Sarria에 도착할 즈음엔 진이랄 게 남아있지 않았고 배가 너무 고파 식당이 보였다 하면 계란과 감자칩을 주문하리라 다짐했다. 조금 더 걸어볼지 먹으며 생각해 보자는 계획이었다. 마을에 들어서서 바를 향해 걷다가 스쳐 지나는 어느 알베르게의 창문 안을 들여다보니, 보름 전 Frómista에서 지나쳤던 미영언니가 있었다. 건물의 1층으로 난 창이 허리까지 오르는 높이였기에 마음만 먹었다 하면 다리를 걸쳐 넘어갈 수 있는 높이였고 것보다 누가 가둬둔 것도 아니니 문으로 드나들 수 있었으므로 그리 애틋할 이유도 없건만 우리는 무슨 열렬한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창문의 쇠창살을 사이에 두고 한동안을 반가워하며 애만 태웠다. 그러다 정신을 차렸는지 어서 들어오라고 하기에 우선 주린 배부터 채우고 오겠노라 말한 후 근처에 있는 바에 들어가 하루 종일 상상했던 그대로 계란과 베이컨, 감자튀김을 먹었다. 먹고 나서도 한참을 더 걸을지, 쉬어갈지 고민하다가 신(神)까지 원망하고 나선 하루건만 뭘 위해 그렇게까지 걸어야 하나 싶어 멈추기로 결정했고, 구태여 다른 알베르게로 향할 이유도 없어 미영언니를 마주쳤던 알베르게로 몸을 돌렸다.
들어오자마자 푹 삶은 시금치에 시멘트를 발라놓은 것처럼 꾸덕히 굳어버린 몸을 개운하게 씻어내고 난로 앞에서 몸을 녹이며 조금 쉬었다. 아, 정말이지 너무 힘든 하루였다. 눈앞에 난 길도 표시석도 화살표도 모두 가증스럽기 짝이 없고 짜증만 났다. 어찌 보면 이런 의미에서 Astroga부터 Santiago까지 정신의 길이라 불리는 걸까. 뭐가 되었든 몸상태가 좋지 못해서인 것도 같다. 괜찮아지면 모든 게 더 나아지겠지. 부어올라 턱끝까지 차오른 목구멍에 원래는 만만하기도 하겠다 그럴싸하게 몸에 보신까지 되겠다 뜨듯한 백숙을 먹으려 했으나 스멀스멀 귀찮은 마음이 들기도 했고 도착하고 먹은 식사가 아직 소화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과자 몇 개와 음료수, 아이스크림으로 대신해서 나눠먹으며 심심한 배를 달랬다.
내일은 몸이 좀 괜찮아져야 할 텐데, 하고 아무리 골똘히 걱정을 한대도 얼마간은 앓고 지나가야 병인 법이고 어느 정도는 아파야 낫는 법이다. 딴에 다른 방도가 없어 크디큰 비상약들을 손바닥에 한데 모아 덥석 삼키고는 침대에 누웠다. 아프니까 청춘이랬나, 아프면 환자지 뭔 빌어먹을 청춘인가 싶은 날 선 생각도 아픈 몸과 함께 약아빠져 버린 건가, 이리도 아슬할 적에 흔들리는 정신이 어쩌면 이렇게도 나약할까 싶어 피식 웃음이 터졌다. 산 설고 물 선 곳에서 홀로 앓고 있자니 걷잡을 수 없는 공상이 깊어져 까마득히 잊어버린 줄 알았던 기억 속의 일들을 죄다 불러들였고 욱신하게 쑤시는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긴 밤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약기운이 돌면 걷지 못할리야 있겠는가, 길 위에 한 곳에 머무르거나 어딘가에서 그치는 선택지는 없으니 그저 걷고 또 걸을 뿐이다. 'Buen Camino.'
Question 30. 산티아고가 얼마 남지 않은 기분은 어때?
O cebreiro를 지나 Galicia지방에 들어오니 500m를 지나는 지점마다 표시석이 있다. 세워놓은 기준도 가지각색인지 걷다 보면 응당 남은 거리는 줄어들기 마련인데 늘었다 줄었다 들쭉날쭉하는 것이 꼭 농락이라도 하는 듯하다. 그러자고 남은 거리가 마냥 줄어들기를 바라자니 이 길이 끝나가는 것만 같아 아쉬운 마음이 먼저 든다. 오늘 도착한 Sarria부터 산티아고까지는 115km가 남았으므로 적게는 사흘, 혹은 나흘정도 남은 셈이다. 본래 나는 산티아고에서 멈출 생각은 없고 며칠간 더 서쪽 방향으로 걸어 Fisterra까지 향할 생각이므로 산티아고는 나에게 도착이라는 의미보다는 함께 걷던 이들과의 헤어짐이 더 크게 다가오고 그렇기에 벌써부터 미련 어린 서운함이 먼저 든다. 산티아고에 도착한대도 헤어짐은 헤어짐으로 남을 것이고, 나에게는 여전히 걸어야 할 길이 남아있을 것이며, 모든 길이 끝난 대도 가야 할 길은, 또 보이지 않는 노란 화살표는 언제 어디든 있을 것이다. 걸어오는 길은 어땠는가, 약 750km의 길을 걸어왔건만 아직 뭔가를 깨치거나 배우게 된 것 같지는 않다. 언젠간 걸어왔던 길의 의미도 앞으로 향해야 할 길도 깨달아 알 수 있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