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세와 달빛 아래 거닐다

헤세 기행 4

by 뮌헨의 마리


칼브는 아주 작은 마을. 생각보다 더 작고 아담한 마을. 구도시를 감싸고도는 강 건너에 손바닥만 한 마을이 펼쳐지는 곳.



헤세의 고향 칼브 Calv에 왔다. 칼브는 아주 작은 마을. 생각보다 더 작고 아담한 마을. 구도시를 감싸고도는 강 건너에 손바닥만 한 마을이 펼쳐지는 곳. <수레바퀴 아래>의 모델이 된 니콜라우스 다리 위 헤세의 동상까지 풍경의 일부가 되는 곳, 그런 곳이 칼브였다. 숙소를 역 근처에 잡은 건 신의 한 수. 숙소를 나오자 길 건너편에 다리가 있고 거기 헤세가 서 있더라는. 놀라워라, 우연이여! 작은 시골 동네라 밤늦게 돌아다니기도 걱정이었는데. 그런데 일몰 시간인 9시 반이 지나도 어둠은 찾아오지 않았다. 빠른 걸음으로 마을 광장 부근을 돌아보고 헤세 박물관 장소부터 확인한 후 헤세의 다리 위로 돌아왔다. 그때부터였다. 헤세와 달빛 아래를 걸은 것은.


헤세는 다리의 1/3쯤 시가지 쪽을 향해 서 있었다. 한 손에는 챙이 있는 모자를, 다른 손은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비스듬히 몸을 왼쪽으로 돌려 구시가지를 바라보고 있던 사람. 헤세 옆에는 작은 벤치 하나. 헤세의 빨간 벤치에 반달과 함께 그림처럼 앉아있던 밤은 하나도 쓸쓸하지 않았다. 불안하지도 않았다. 다리 위의 가로등은 밝았고, 밝고 맑은 달빛도 빛을 보탰다. 고개만 들면 큰 길가에 내가 묵을 숙소의 불빛이 밝게 비쳤다. 고요한 벤치에 앉아 헤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일. 어둠이 그의 머리를 지나 어깨로 내려앉는 모습. 고개도 돌리지 않은 그가 한 손을 들어 익숙하고도 다정하게 밤의 손등을 톡톡 두드리거나 등을 쓸어주는 것을 지켜보는 일. 칼브가 나를 위해 준비한 가슴 두근거리도록 멋진 선물이었다.



그날 밤 나는 헤세의 다리 위에 오래 머물렀다. 나는 앉고 헤세는 선 채로. 오래 기다려온 연인들처럼 말없이 그를 바라보는 일은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와 나 사이에 침묵만이 있었던 건 아니다. 물소리, 바람 소리, 어린 별들의 칭얼거림, 잠꼬대 소리. 정다운 공기로 주위는 충만했다. 말은 없어도 좋았다. 말이 없어서 더 좋은 순간들이 있다. 그와 함께 다리 아래 강물에 비치는 노을과 붉게 물들어가는 하늘을 번갈아 내려다보고 올려다보던 순간들. 밤이 깊을수록 밤하늘은 선명하고도 밝게, 더더욱 푸르게 물들어 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겠지. 그 벤치에, 그 물가에 헤세와의 달빛 산책을 추억으로 남기고 숙소로 돌아왔다.


그 밤 헤세가 준비했던 사유는 무엇이었을까. 자아의 발견? 내면의 평화? 니르바나? 일명 해탈? 헤세가 던져준 숙제로 간직해야겠다. 그날 칼브의 다리 위에서 발견한 글귀는 이렇다.


Wenn ich jetzt wieder einmal nach Calv komme...

Bleib ich lang auf der Brücke stehen.

Das ist mir der liebste Platz im Städtchen.


Hermann Hesse


내가 다시 칼브로 돌아온다면

다리 위에 오래 서 있으리라

이 작은 마을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곳에


헤르만 헤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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