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세가 앉아 책을 읽었을 법한 이끼 낀 나무 벤치에 마음을 빼앗긴 곳, 마울브론. 저 무성한 그리움.. 헤세여, 나도 유월의 어느 오후 마울브론에 있었노라.
다음날은 헤세 박물관. 수많은 언어로 번역된 헤세의 노란 책들. 헤세의 젊은 날과 노년의 미색과 갈색 사진들. 순하고 여리고 맑은 톤의 수채화들. 날씨는 화창했고, 햇살은 눈부셨고, 공기는 청명했다. 열린 문학관의 통유리 밖으로 녹음이 짙어가는 유월이 기세 좋게 진을 치는 분주하고 소란한 기척들. 초록빛 활기. 헤세를 만나기 좋은 계절이었다. 나는 그를 그날의 날씨처럼 기억할 것이다. 마지막은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돌아보면 화면 속으로 뛰어들어가 카드를 뒤집듯 바꾸고 싶은 날들은 얼마나 많은지. 장소든 날씨든 사람이든 할 수만 있다면 지우거나 잊거나 잊히고 싶은 장면들의 조합이 인생의 패다.
헤세 박물관 말고도 칼브에는 눈도장과 사진을 차례로 찍고 마음을 담아야 할 곳이 몇 군데 더 있었을 것이다. 그런 일정이 없어도 괜찮았겠다. 헤세 박물관 앞 광장의 노천카페에서 헤세 박물관을 바라보며 커피만 마시고 앉아 있어도 얼마나 좋았을 것인가. 그런데 헤세 박물관 기념품 숍에서 엽서를 몇 장 사들고 나오다가 갑자기 드는 생각. 여기까지 와서 마울브론 수도원을 안 가면 어쩐다? 예정에는 없던 일정이었다. 칼브의 작은 역에 들렀더니 곧 기차가 하나 들어올 예정이며, 그 기차를 타고 가서 또 한 번의 시외버스로 갈아타면 마울브론에 갈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마음의 준비도 고별의 말도 없이 칼브와 단번에 작별했다. 이별이란 그래야 하는 법.
칼브에서 포르츠 하임행 빨간색 작은 기차는 만원이었다. 포르츠하임 역에 내릴 때는 생각보다 시간이 지체되었고, 내가 타야 할 버스 정류장까지는 거리가 멀지 않았음에도 버스는 떠나고 없었다. 그리고 꼬박 1시간의 기다림. 그 사이 날씨마저 수상해져서 바람은 불고, 기온은 떨어지고, 공기는 스산했다. 헤세의 수도원은 쉽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사진: 칼브 지도와 헤세 박물관(위) 칼브-포르츠하임까지는 빨간 기차(아래)를, 포르츠하임-마울브론 구간은 선로 공사 관계로 기차를 이용하지 못하고 시외 버스로 이동해야 했다.
수도원의 규모는 무척 컸다. 마치 중세의 성 안 마을 같았다. 아치의 이중문을 통과하자 오른쪽엔 책방. 왼쪽엔 빨간 A자가 선명한 약국 아포테케와 관공서 건물이 나란히 서 있었다. 책방과 몇 개의 숍을 지나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수도원 내부 입장권을 구매했다. 넓은 수도원 광장을 가로질러 정면 끝쪽에 가로로 늘어선 건물이 방문이 허락된 곳이었다. 아치형 긴 복도. 높은 천장. 돌로 만든 오래된 건축물 특유의 건조한 서늘함. 건물 한가운데 조성된 정원의 울창한 나무 한 그루. 그 아래 헤세가 앉아 책을 읽었을 법한 이끼 낀 나무 벤치에 마음을 빼앗긴 곳, 마울브론. 저 무성한 그리움.. 헤세여, 나 역시 유월의 어느 오후 마울브론에 있었노라.
수도원의 내부 성당을 비롯 무거운 공기와 오래된 시간 속을 돌아보는 일은 나를 금방 지치게 만들었다. 복도 반대편의 낮고 어둡고 작은 공간들을 들여다볼 때는 가슴이 무겁고도 답답하게 조여왔다. 헤세가 단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었던 곳이라서? 그럴 수도 있겠다. 광장에는 카페와 레스토랑과 맑은 공기가 푸른 허공 속을 떠도는 웃음소리로 나를 맞이했다. 다시 수도원의 광장 마당으로 나오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느긋한 오후의 커피를 즐기고 있었다.
나 역시 짧은 일정에 마울브론까지 무사히 온 것을 자축하며 광장 카페에 앉아 카푸치노를 마셨고, 그 옛날 마울브론에서 보냈을 헤세의 시간과 그의 작품들과 그를 지독하게 사랑하는 내 주변 사람들을 생각했다. 오후 4시. 떠날 시간이 가까워졌다. 다시 비친 햇살이 수도원 건물들 지붕과 광장 마당에 줄 지어 선 나무들과 초여름 꽃잎들 위에서 반짝였다. 헤세여, 유월에 당신을 만나러 나 역시 마울브론에 갔었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