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이지만, 애석하게도 내가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말이다. 될 때까지 한들 내 나이가 이미 노인이 되어버린다면, 그 시간 동안 정작 내가 했어야 할 사소한 행복을 놓쳤다면 의미 있는 승리인가 그런 생각을 한다.
"우리 삼세 판하자."
어릴 적 가위바위보나 어떤 친구와의 놀이 승부를 낼 때 늘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었다.
삼세판은 내 인생에도 적용된다. 나는 지금까지 3번 해보고 안 되는 일에 더 이상 노력한 일이 없다. 3번 승부를 걸어봤는데 내 것이 안된다면,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면, 이 회사가 3번째 날 퇴짜 놓았다면 나도 그만 포기했다. 아 이것과 나는 이번 생에 타이밍이 안 맞는구나. 물러나자.
그런데 그 포기할 시점엔 화가 나거나 괜히 못난 나에게 화풀이하는 것보다 개운함이 더 날 채웠다.
나. 세 번이나 노력했어. 정말 열심히 도전했지. 어쩔 수 없지. 드라마 주인공처럼 매사 열정적으로 사는 것도, 치열하게 노력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3번 정도 내가 애써봤지만 안된다면 이번 생에 안 되는 거다. 그럼 다른 걸 알아볼까. 나와 좀 더 맞는 회사를 알아봐야지.
포기도 어쩔 땐 큰 위안이 된다.
안 되는 일은 분명 있다. 불가능한 일도 있다. 나이가 들수록 인생이 더 노련해진다기보다 나는 불가능한 일 앞에서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기술이 생기는 기분이다. 십 대, 이십 대에는 안 되는 일에 화도 나고, 모든 게 못난 내 탓인 것 같고, 결국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안목 없는 세상 탓인 것 같았다.
능력이 부족한 내 탓, 나를 더 도와주지 않는 환경의 탓, 나를 더 빛나게 해주지 못하는 주변 사람들의 탓. 안 되는 일 앞에서 안될 수밖에 없었던 탓을 하다 보면 더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딱 삼세판. 삼세판 했는데 안됐다면 물러서자. 세상엔 더 즐거운 일이 많고, 더 가치 있는 일이 있지. 그리고 내가 삼세판이나 걸었던 저 회사가, 저 일이 세상에 전부가 아닐 수 있어. 내 실패를 인정하고, 더 이상 누군가의 탓을 하지 않기로 하고 오직 삼세판이나 노력하고 열심히 한 나 스스로를 칭찬해주니 더 힘이 났다.
아이가 유치원에 다녀와서 " 엄마 동그라미가 예쁘게 안 그려져. 몇 번이나 다시 그려도 안 예뻐."
괜찮아. 못 그리면 네모나 세모를 그려봐. 동그라미는 예쁘게 안되어도 네모 세모는 예쁘게 되잖아. 그럼 된 거지. 다 잘 그릴 필요 없어. 그렇게 노력했는데 동그라미가 안되면 어쩔 수 없지. 이젠 애쓰지 말고 기다려. 아마 내년 7살이 되면 예쁘게 그려질 수도 있어.
내 말이 다 정답일 수 없고, 조금이라도 노력하지 않으면 도태되는 현대사회에서 속 터지는 여유일 수 있지만 아이 말대로 그렇게 노력했는데 동그라미가 본인 눈에 예쁘게 안된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거다. 대신 나는 모양자나 컴퍼스를 하나 구입해서 아이의 마음을 조금 편안하게 할 수밖에. 세상엔 요런 요행도 부릴 수 있어.
고등학생 때. 수능만 치면, 스무 살이 되면 무조건 다 행복해지는 줄 알았다. 얼굴의 여드름이 싹 없어지고, 고3 때 찐 살들도 모두 빠지고, 시트콤 '논스톱' 등장인물과 같은 캠퍼스 생활을 할 줄 알았다.
하지만 살은 내가 혹독한 다이어트를 해서 뺐고, 논스톱 주인공들처럼 캠퍼스 생활을 하려니 아르바이트로 옷도 사 입고, 모임도 참석하며 부단히 노력해야 했다. 학회 가입도 해보고 여러 모임을 나가며 그 사람들을 만들어야 했고 그 시간에 못한 공부도 하며 학점도 최소한 수준은 유지해야 했다. 논스톱에선 좋은 사람들, 좋은 친구들 아무 걱정 없이 청춘을 즐기는 모습만 나왔는데 현실은 너무 달라 내가 시트콤이 아닌 다큐멘터리를 찍는 기분이었다.
인생은 정말 그저 손에 생기는 것이 없었다.
늘 노력해서 얻고, 하나 이루면 다음 것이 눈에 들어왔다. 혹은 자격증 시험이나, 토익 점수처럼 어쩔 수 없이 넘어야 하는 큰 산도 하나씩 넘어야 했다.
사는 게 이렇게 고단한 일이라니. 스무 살이 되면 매일매일 행복할 일만 생길 줄 알았는데. 그저 예쁜 사람들과 아름다운 일만 있을 줄 알았는데. 학교 울타리를 벗어난 세상은 정말 아마존 정글 같았다. 간사한 뱀도 있었고 날 물어뜯는 하이에나도 있었다. 치열하게 보내다가 어쩌다 만난 꽃밭은 정말 가끔 찾아왔다. 행복은 정말 어쩌다 생기는 해프닝이었다.
하지만 장미같이 화려하고 짧은 이십 대 청춘을 지나 보니 가끔 찾아오는 행복인 걸 알기에 그 순간을 더 즐기는 습관도 생겼다. 그리고 그 행복의 기준도 좀 더 소박해졌고 시시해졌다.
예전엔 공모전에 수상이 되거나, 학교 신문에 나거나, 남들에게 좋은 일로 이름이 불리는 것만 대단한 행복인 줄 알았다. 하지만 흔하지만 늘 우직하게 그 자리에서 피는 진달래 같은 나이가 되어보니 그저 아무 탈 없이 지나는 일상도 행복이고, 아이가 오늘 하루 아프지 않고 즐겁게 유치원에 다녀오는 것도 행복이다.
남편이 무사히 출퇴근하는 오늘 저녁도, 저녁밥을 먹으며 회사 이야기, 상사 이야기하며 힘내자 캔맥주 같이 하는 이 순간도 행복이다.
꿈 많고, 치열했던 이십 대의 내가 본 지금의 나는 시시하고 욕심 없는 아줌마로 보이겠지만, 이십 대의 화려한 목표도 당시에 행복인 건 사실이고, 지금 역시 무사한 일상도 내 행복인 건 사실이다. 단지 행복의 기준이 달라졌을 뿐.
우리 부부는 아이에게 "하면 된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일이나 물건을 얻기 위함 뿐만 아니라 사람 관계도 네가 좋아도 그녀가 혹 그가 싫다 한다면 깨끗이 물러나라고 말한다. 가끔 우리 부부는 데이트 폭력이나 스토커 사건을 보면서 다 우리 어릴 적에
'하면 된다'
'골키퍼 있는데 골 안 들어가냐'
끊임없이 시도하라 가르쳐서 그렇다고.
도전하라곤 가르치곤 포기하거나 물러서는 법은 알려주지 않아서 그렇다고.
때론 안 되는 일도 있고 물러설 일도 있다는 걸 우린 가르쳐주자 서로 다짐했었다.
나에게 아름다운 도전이 상대에겐 끔찍한 부담일 수도 있다. 뭐든 적당히. 때가 되어 물러서는 것도 참 아름답고 박수받을 일이다.